사람 이야기2012.05.08 08:26

1866년 프랑스 함대는 왜 조선에 갔을까?

 

[병인양요에 관한 새로운 진실]

 

 

외규장각 도서가 영구 임대의 형식으로나마 한국으로 돌아갔고, 반평생을 직지와 의궤 연구에 바친 박병선

 

박사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외규장각 도서 약탈에 관련된 프랑스와의 관계는 일단락 되었다고 해도

 

되는 것인가요?

 

 

지나간 역사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어떤 사건이 있었던 배경과 이유를 밝히는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중요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막연히 선교사를 박해한 조선에 대항해 프랑스가 함대를 이끌고 침입한 것을 병인 양요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4병인 양요에 대해 새롭게 접근한 책이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는데, 현재 프랑스 고등

 

사회 과학 대학원[EHESS]에서 박사 과정에 있는 피에르 엠마뉴엘 후[Pierre Emmanuel Roux]씨가 집필한

 

십자가, 고래, 그리고 대포[La Croix, La Baleine et Le Canon, Ed. Cerf] 라는 저서입니다.

 

 

부제목은 19세기 프랑스의 대조선 정책으로, 피에르 엠마뉴엘씨는 현재 파리의 동양언어 대학인

 

이날꼬[Inalco]에서 한국어와 한자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학을 연구하다 자연스럽게 한국학을 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자인 피에르 엠마뉴엘 후[Pierre Emmenuel Roux]씨

 

 

프랑스 대통령 결선이 있던 어제, 5 6일에 방문한 피에르 엠마뉴엘씨의 집 한쪽 벽에는 훈민정음이 장식하고

 

있었고, 프랑스 학자의 서재에는 온통 한국어로 된 책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습니다.

 

피에르 엠마뉴엘 후라는 이름을 이번에 알았고 저는 그동안 같은 동네의 민비 아빠로 불렀더랬습니다.

 

아내가 한국인으로 민비와 윤비라는 아주 예쁜 자녀들을 두고 있습니다. 연구하는 학자인줄은 알았지만 그가

 

병인양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는것을 이번에서야 알았습니다. 그는 한국말을 얼마나 구수하게 구사하는지

 

모릅니다.

 

 

인터뷰 내내 프랑스말 한마디하지 않았더랬습니다. 그는 막히는 단어가 있으면 불어를 사용하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어떻게 하든지 한국어로 설명해주려고 한게 정말 고맙고 좋더군요.

 

 

그가 이번에 출간한 저서, 십자가, 고래, 그리고 대포는 역사 저서치고는 제목부터 남 달랐습니다.

 

이는 한국학 석사 논문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기독 서적을 주로 발간하고 있는, cerf 출판사는 책 제목을 보고는 바로 계약을 하자고 했답니다.

 

 

지도 교수가 그에게 준 주제는 프랑스인들이 당시 왜 조선에 갔을까였다는데~

 

그는 외규장각 도서 약탈이 있었던 병인양요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원인인 프랑스 선교사 박해는 핑계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는 1840년부터 있었던 프랑스 외교 고문서를 몇 달에 걸쳐 읽었다고 합니다.

 

 

그에 의하면 프랑스는 당시 동아시아에 식민지 건설 계획은 없었답니다. 하지만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하고

 

다른 유럽 나라들이 아시아권 나라에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보고는 힘이 약해질 것을 우려해 덩달아

 

나선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책을 소개하면서 들려준 병인양요가 일어난 발단,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간 이유는 4가지로 볼수

 

었습니다.

 

 

먼저 당시 프랑스의 표적은 조선이 아닌 중국이었답니다. 병인양요시 프랑스 군인은 상하이와 광주 주둔하고 있는

 

이들로, 고작 5백명이었답니다. 피에르 엠마뉴엘씨는 오백명으로 어떻게 한나라를 공격할수 있냐는것,

 

그래서 당시 조선은 북경으로 향하고자 했던 프랑스인들의 다리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다음 책 제목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고래는 상하이 프랑스 공사가 조선 바다에 고래가 출몰하기에 잡으로 간다고

 

답니다. 실제로 1850년대에 조선 바다에 고래가 나오기는 했었지만 이내 사라졌다고 합니다.

 

 

세번째 러시아의 남하 진출을 방해하기 위한 것으로, 1853년부터 1856년까지 러시아와 유럽 연합 국가들과의

 

크림 전쟁 이후 러시아와 프랑스는 대립 관계였답니다.

 

 

그리고 네번째는 1860년대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이, 정부에 의한 박해가 아닌 암암리에 살해되는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중국에서 활동하는 서양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에서 대포를 쏘며 프랑스의 힘을

 

 

보여주는 대포 정책을 편 것으로, 그래서 책 제목에 대포가 들어간 것이라고요~

 

 

가족과 함께

 

 

그와의 질문과 답을 대화 형식으로 엮었습니다.

 

 

병인 양요를 선택한 이유는요?

 

 

19세기의 프랑스와 조선에 대한 연구를 할 때 피할수 없이 들어가야 되는게 중국이예요.

 

그동안 있었던 연구는 프랑스와 조선에 대한 것이었는데,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함께 연구한게 차이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학을 공부했는데, 프랑스는 중국을 연구한 학자가 많아 고민하던 와중에 우연히 지도 교수에게

 

한국인 장인 어른과의 일화를 이야기하다가, 병인 양요를 선택하게 되었어요. 이는 책 서문에도 명시했습니다.

 

 

아내는 한국인입니다. 중국 유학중에 만났는데, 아내의 보수적인 아버지는 저를 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대학 졸업식날 그녀의 아버지와 어쩔수 없이 첫만남을 가졌는데, 아버지는 바로, 나는 당신이 싫은게 아닌

 

당신 나라가 싫다고 하셨습니다. 아내는 전주 이씨로 조선 왕조 직계 후손입니다. 병인 양요 당시 아내의 집안

 

선조가 수문을 지키다 손이 절단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아버지는 프랑스를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연구하던 중 지도 교수님에게 이 일화를 알려 드렸고, 이에 교수님은 그럼 병인 양요에

 

대해 연구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셨어요.

 

 

지금은 다른 세명의 한국인 사위들 보다 더 사랑받는 프랑스인 사위랍니다.

 

 

관련 자료 찾기가 힘들지는 않았나요?

 

 

역사 연구가 힘든게 자료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것이에요.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에서 4개월을 살다시피

 

했고, 해양부에서는 3개월, 그리고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한 파리 외방 선교회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자료를

 

찾았어요. 또한 한국에 가서 서울 대학교에 있는 규장각도 자주 드나들었고, 책 표지는 서울대 도서관에 있는

 

병인양요 삽화를 허락 받고 사용했습니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었나요?

 

 

일단 외규장각의 도서를 가져간 경위를 보자면, 당시 파리는 조선 침략을 반대했었습니다.

 

멕시코, 베트남과 전쟁 중이었던 프랑스는 경제 위기에 봉착해 있었죠. 프랑스 정부의 결정이 없이는 행할수

 

없었던 것이었어요. 이에 상하이 공사는 러시아와 중국에 있는 서양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세웠고,

 

프랑스 정부는 그럼 조심스럽게 한번 가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갔다가 그냥 오지 말고, 귀중품을

 

가져 오라고 한 것입니다.

 

 

강화도는 조선 국왕의 피난처였는데 로즈 제독이 도착하자 마자 외규장각에 있는 제일 좋은 책을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은 불태우라고 했다더군요. 그렇게 프랑스군은 한달 동안 한양에 갈 생각도 없이 강화도에만 있었어요.

 

그리고 조선군이 오니 바로 중국으로 떠난 것이죠. 군인 오백명으로는 한 나라를 공격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구 임대 형식으로 돌아간 외규장각 도서에 대해서는, 몇 년만에 갱신하는 임대가 어떻게 영구임대라고 할수

 

있나?

 

 

만약 제가 반환해야 된다고 하면 프랑스 도서관에서 못들어오게 할 것이고, 반환하면 안된다고 하면 한국 도서관에

 

자료 찾으러 못가게 되겠죠. [웃음]

 

 

책 집필중인 2010 11월 한국에서 열린 G20 정상 회담에 참석한 사르코지 대통령이 외규장각 반환하겠다는

 

소식을 듣고는 맺음말을 고쳤습니다. 사학자의 시각에서는 외규장각 도서가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 문제로 인해 한국이 프랑스에 알려졌다고 볼수는 있어요.

 

 

 

 

병인양요가 한 불 관계의 시작이 아니었는지요?

 

 

관계로 보지는 않아요. 관계라면 외교가 수립되

 

어야 되어야 하는데 그건 아니죠.

 

저는 이를 만남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병인 양요 20년뒤인

 

1886년부터라고 할수 있죠.

 

 

하지만 한국과 프랑스의 첫만남은 아니었어요.

 

첫만남은 17, 18세기 중국에서 조선인과 프랑스

 

인 선교사와 이미 가졌었습니다.

 

 

 

이번에 출간한 그의 저서. 십자가. 고래 그리고 대포

 

 

 

요즘 인기 있는 프랑스의 한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한국어를 배우는 프랑스 학생들 대부분이 케이팝 때문이라고 합니다. 10년전 동양 언어 대학의 한국어과에 전체

 

생수가 40명이었는데 지금은 400명입니다.

 

한류가 없었으면 우리는 여전히 학생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학계에 남아 한국과 중국, 서양의 만남을 연구할 생각이예요. 저는 외교적인 관계 보다는 만남에 관심이 많습니다.

 

2000년도에 사학 석사를 했는데, 프랑스 사학과에는 아랍 역사는 있는데 동양 사학이 없습니다.

 

 

 

서양이 동아시아와의 만남에 매개체가 된게 바로 천주교로, 선교사와 연관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별

 

로 관심이 없었는데, 연구해보니 흥미롭더군요. 천주교는 동서양의 만남을 주선해 준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중국과 한국의 교회사를 연구할 생각입니다.

 

 

2시간정도 그집에 머무르며 역사 공부를 한듯 했습니다. 어려운 역사를 쉽고도, 구수한 한국말로 얼마나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풀어가던지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더랬습니다.

 

 

민비 아빠는 전형적인 학자였습니다. 오늘 학교앞에서 아이 찾으며 잠시 만났더랬습니다. 작은 아이가 불어로

 

이야기하니, 엄마에게는 한국말 하지? 하고는 한국말을 권하더군요. 그의 한국말 수준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넉달, 석달이라며 우리도 요즘 잘 쓰지도 않는 고유의 말을 구사하더군요.

 

 

돌아오는 길에 그의 아내인 영란씨 선조와 얽힌 일이 범상치 않게 다가오더군요.

 

 

마치 1866년 병인 양요때 조선과 프랑스간에 쌓인 앙금을 145년이 지나 이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함께 살면서

 

어진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Posted by 파리아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