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밀레가 살던 집과 "만종"을 그렸던 장소를 찾아서

파리아줌마 2011. 2. 22. 09:52

그날은 아침부터 그치지 않을것 같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원래 파리 북쪽외곽에 있는 고흐 마을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요즘 저의 처연한 심정과 함께 빗속에서 그옛날 고흐의 고통을 느껴보며, 

그가 거닐었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허허벌판에서 통곡을 하고 올참이었답니다.

물론 가족들이 있으니 마음속으로요^^

그리고는 가슴 뜨거운 포스팅을 할작정이었답니다.

 

로댕 박물관에서 비련의 여인 까미유 끌로델이 가졌던 인간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고통을 느껴보듯, 고흐가 살았던 마을에서

광기로 치닫을수밖에 없었던 그의 아픔을 느껴보려고 한다면 그의 작품을 더욱

깊이 이해할수 있을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가는길에 누군가에게 전화로 길을 묻던 남편이

3월이 되어서야 문을 연다고 합니다. 그래서 핸들을 남쪽 밀레 마을로 꺾었답니다.

약간 김샌 느낌과 함께 <오버하지 마라>는 하늘의 메세지임을 알고, 

경건하고 소박한 농민의 삶을 그린 밀레 마을로 향했답니다.

 

파리에서 6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바르비죵 마을 입구입니다. 

간판 그림이 놓여진 곳에 밀레의 캔버스가 있었답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인지 별느낌은 없답니다.

비가 어찌나 추적추적 내리던지요.ㅠㅠ

 

예전에는 만종의 포즈까지 취해서 사진을 찍기도 했드랬지요.

아주 즐겁게 놀았던적이 있었습니다.

 

 

 

 

밀레의  <만종>의 원본은 현재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고 합니다.

얼마전 인터넷을 통해 만종에 얽힌 슬픈 이야기를 알았습니다.

원래 하루일과가 끝나고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평화로운 부부의 모습을 그린것으로 알려졌었는데,

바구니에 들어 있는 감자에는 원래 아사한 아기 주검이 그려져 있었답니다.

이를 본 밀레 친구가 파장을 우려해 지우고 감자를 그려넣을것을 권해서 밀레는 고심끝에 친구의 권유대로 했다고 합니다.

 

이는 살바도르 달리에 의해 밝혀졌다고 하는데요.

달리는 어려서부터 이 그림을 보고 형언할수 없는 불안을 느끼면서 성인이 되어서도 집요하게

 이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고 합니다. 그의 눈에는 감자가 있는 바구니가 계속 관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수십년이 흐른뒤에서야 그의 투시력은 환각이 아닌 정확한 관찰력이었음이 밝혀졌답니다.

루브르 미술관이 자외선 투사작업을 통해 그 감자바구니가
초벌그림에서는 어린아이의 관이었음이 입증되었던것입니다.


 

밀레는 이곳에서 26년간 머물었다 임종했습니다.

이 마을은 퐁테블로 숲에 인접한 인구 2천명정도 되는 조그마한 마을, 바르비종[BARBIZON]입니다.

이곳은 1830년부터 1890년 무렵 80여명의 예술가들이 살며 들판과 숲을 그린 대표적인 바르비종 학파, 즉 농촌학파를 탄생시킨곳입니다.

마을이 무척 고요하고 아름답습니다.

 

오른쪽은 성당이고요, 왼쪽에 테오도르 루소의 박물관이 있는데, 문을 닫았더라고요.

 

루소 박물관을 물으니 청소년들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더라고요.

아이들이 귀엽고 예뻐보이길래 사진에 담아 보았습니다.

쿨~하게 포즈도 취해주더라고요.^^

 

항상 날씨가 화창할때만 왔었는데, 비오는 날도 나름 운치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시골마을의 조그마한 식료품 가게입니다.

 

밀레가 살던 집입니다. 들어가 보시죠.

 

 

아뜰리에와 식당 그리고 벽난로가 있는 거실, 세칸 정도였습니다.

윗층이 있는데 안전상 개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밀레는 이곳에서 그의 9자녀들과 살았답니다.

밀레는 작업을 할때 나막신을 신고 했답니다. 그래서 저런 신발이 놓여져있나보더라고요.

 

밀레는 1814년 프랑스 노르망디 셜부르그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뎃생에 자질이 있음을 알고 그림학교에 등록시켜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살롱전에서 성공을 했지만 결국은 돈이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 초상화가로 자리잡습니다.

첫결혼에서 아내가 일찍 죽고 나서 하녀인 까뜨린느 르매르와 함께 살게됩니다.

 

1849년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밀레와 까뜨린느 르매르는 이곳, 바르비종으로 피신오게 되면서 몇주일을 생각하고 떠난 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당시 이미 바르비죵 샤이이 들판에 있는 초가집에서는 몇몇화가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밀레는 자기 작업의 진수들을 만들어 냅니다.

 

안내하는 분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농부에 관한 주제는 1850년대초부터 그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지만,

이 주제가 처음으로 뚜렷하게 드러난 중요한 작품은 1848년 파리 살롱전에 입선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그림은 나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답니다.

 

농촌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씨뿌리는 사람 >,<만종>,<소치는 여인> 등이 있으며 그외에 일상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파스텔화 및 소묘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바르비종에 정착한 이후로 농부를 그린 그림을 계속 발표했고, 그결과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답니다.

밀레의 입장을 옹호하던 그당시의 편지들은 그림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이

근본적으로 고전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고요.

 

1860년대 중엽에 이르자 밀레의 작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답니다.

그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1867년의 전시회에 9점의 주요작품을 출품한 뒤인 1868년이었답니다.

 

 

밀레의 자녀들이 그린 그림들이라고 합니다.

 

 

 

식당으로 왔습니다.

밀레의 자화상들입니다.

 

밀레가 쓴 편지

 

식당입니다.

고흐는 스스로  밀레의 제자임을 자처했다고 합니다.

보이는 테이블 위에 있는 파일에는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모방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이곳에 오면 하얀 콧수염이 있는 할아버지가 반겨주고 안내해주었습니다.

오랜 밀레 집지기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이안쪽 거실은 그의 이름을 따서 조르쥬 리샤르방이라고 불린답니다.

그분은 2002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꽤 오래된 사진인것 같습니다.

조르쥬 리샤르씨가 한국에서온 김종필씨 일행을 안내하고 있는 사진이 걸려있더라고요. 

 

이지역 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하고 판매합니다.

 

벽난로는 퐁텐블로성에서 일하는 갈리치가 인조석재를 사용하여 이태리풍으로 바꾸었답니다.

이방에는 우편엽서, 판화, 책등을 판매합니다.

 

다시 식당으로 돌아와서요, 이건 테오도르 루소가 사용했던 팔레트입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입니다.

 

저 시계는 항상 6시만 가르키고 있답니다.

 

사진 가운데에 보이는게 밀레가 사용했던 팔레트입니다.

 

밀레의 젊은 시절 초상화입니다.

 

 

전구를 씌어놓은 갓이 특이 합니다

 

                                                                                밀레의 뎃생들입니다.

 

밀레의 아뜰리에 그림이고요,

 

 

밀레 집과 아뜰리에를 보고 나오니 비가 그쳐있었습니다.

 

이곳에는 갤러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 화려하지 않고 단아한 갤러리들이 길에 즐비하게 있습니다.

 

 

갤러리,,

 

                                             밀레는 파리의 아뜰리에에 틀어박혀서 그림을 그렸던 기존의 화풍을 거부하고

                                                              직접 농촌으로 들어가 생활하면서 그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아낸 최초의 화가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림에서는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농촌 사람들과 풍경을

                                                                    주제로 해서 가감없이 보여주었지만,

                                           독특한 색채나 화법, 구도 등으로 차분하고 경건하게 바라보게 만드는것 같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자연주의 화가의 선구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프랑스 농촌은 힘들었을지라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한가롭고 풍요로와 보이기만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