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2012.05.08 08:26

1866년 프랑스 함대는 왜 조선에 갔을까?

 

[병인양요에 관한 새로운 진실]

 

 

외규장각 도서가 영구 임대의 형식으로나마 한국으로 돌아갔고, 반평생을 직지와 의궤 연구에 바친 박병선

 

박사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외규장각 도서 약탈에 관련된 프랑스와의 관계는 일단락 되었다고 해도

 

되는 것인가요?

 

 

지나간 역사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어떤 사건이 있었던 배경과 이유를 밝히는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중요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막연히 선교사를 박해한 조선에 대항해 프랑스가 함대를 이끌고 침입한 것을 병인 양요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4병인 양요에 대해 새롭게 접근한 책이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는데, 현재 프랑스 고등

 

사회 과학 대학원[EHESS]에서 박사 과정에 있는 피에르 엠마뉴엘 후[Pierre Emmanuel Roux]씨가 집필한

 

십자가, 고래, 그리고 대포[La Croix, La Baleine et Le Canon, Ed. Cerf] 라는 저서입니다.

 

 

부제목은 19세기 프랑스의 대조선 정책으로, 피에르 엠마뉴엘씨는 현재 파리의 동양언어 대학인

 

이날꼬[Inalco]에서 한국어와 한자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학을 연구하다 자연스럽게 한국학을 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자인 피에르 엠마뉴엘 후[Pierre Emmenuel Roux]씨

 

 

프랑스 대통령 결선이 있던 어제, 5 6일에 방문한 피에르 엠마뉴엘씨의 집 한쪽 벽에는 훈민정음이 장식하고

 

있었고, 프랑스 학자의 서재에는 온통 한국어로 된 책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습니다.

 

피에르 엠마뉴엘 후라는 이름을 이번에 알았고 저는 그동안 같은 동네의 민비 아빠로 불렀더랬습니다.

 

아내가 한국인으로 민비와 윤비라는 아주 예쁜 자녀들을 두고 있습니다. 연구하는 학자인줄은 알았지만 그가

 

병인양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는것을 이번에서야 알았습니다. 그는 한국말을 얼마나 구수하게 구사하는지

 

모릅니다.

 

 

인터뷰 내내 프랑스말 한마디하지 않았더랬습니다. 그는 막히는 단어가 있으면 불어를 사용하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어떻게 하든지 한국어로 설명해주려고 한게 정말 고맙고 좋더군요.

 

 

그가 이번에 출간한 저서, 십자가, 고래, 그리고 대포는 역사 저서치고는 제목부터 남 달랐습니다.

 

이는 한국학 석사 논문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기독 서적을 주로 발간하고 있는, cerf 출판사는 책 제목을 보고는 바로 계약을 하자고 했답니다.

 

 

지도 교수가 그에게 준 주제는 프랑스인들이 당시 왜 조선에 갔을까였다는데~

 

그는 외규장각 도서 약탈이 있었던 병인양요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원인인 프랑스 선교사 박해는 핑계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는 1840년부터 있었던 프랑스 외교 고문서를 몇 달에 걸쳐 읽었다고 합니다.

 

 

그에 의하면 프랑스는 당시 동아시아에 식민지 건설 계획은 없었답니다. 하지만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하고

 

다른 유럽 나라들이 아시아권 나라에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보고는 힘이 약해질 것을 우려해 덩달아

 

나선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책을 소개하면서 들려준 병인양요가 일어난 발단,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간 이유는 4가지로 볼수

 

었습니다.

 

 

먼저 당시 프랑스의 표적은 조선이 아닌 중국이었답니다. 병인양요시 프랑스 군인은 상하이와 광주 주둔하고 있는

 

이들로, 고작 5백명이었답니다. 피에르 엠마뉴엘씨는 오백명으로 어떻게 한나라를 공격할수 있냐는것,

 

그래서 당시 조선은 북경으로 향하고자 했던 프랑스인들의 다리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다음 책 제목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고래는 상하이 프랑스 공사가 조선 바다에 고래가 출몰하기에 잡으로 간다고

 

답니다. 실제로 1850년대에 조선 바다에 고래가 나오기는 했었지만 이내 사라졌다고 합니다.

 

 

세번째 러시아의 남하 진출을 방해하기 위한 것으로, 1853년부터 1856년까지 러시아와 유럽 연합 국가들과의

 

크림 전쟁 이후 러시아와 프랑스는 대립 관계였답니다.

 

 

그리고 네번째는 1860년대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이, 정부에 의한 박해가 아닌 암암리에 살해되는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중국에서 활동하는 서양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에서 대포를 쏘며 프랑스의 힘을

 

 

보여주는 대포 정책을 편 것으로, 그래서 책 제목에 대포가 들어간 것이라고요~

 

 

가족과 함께

 

 

그와의 질문과 답을 대화 형식으로 엮었습니다.

 

 

병인 양요를 선택한 이유는요?

 

 

19세기의 프랑스와 조선에 대한 연구를 할 때 피할수 없이 들어가야 되는게 중국이예요.

 

그동안 있었던 연구는 프랑스와 조선에 대한 것이었는데,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함께 연구한게 차이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학을 공부했는데, 프랑스는 중국을 연구한 학자가 많아 고민하던 와중에 우연히 지도 교수에게

 

한국인 장인 어른과의 일화를 이야기하다가, 병인 양요를 선택하게 되었어요. 이는 책 서문에도 명시했습니다.

 

 

아내는 한국인입니다. 중국 유학중에 만났는데, 아내의 보수적인 아버지는 저를 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대학 졸업식날 그녀의 아버지와 어쩔수 없이 첫만남을 가졌는데, 아버지는 바로, 나는 당신이 싫은게 아닌

 

당신 나라가 싫다고 하셨습니다. 아내는 전주 이씨로 조선 왕조 직계 후손입니다. 병인 양요 당시 아내의 집안

 

선조가 수문을 지키다 손이 절단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아버지는 프랑스를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연구하던 중 지도 교수님에게 이 일화를 알려 드렸고, 이에 교수님은 그럼 병인 양요에

 

대해 연구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셨어요.

 

 

지금은 다른 세명의 한국인 사위들 보다 더 사랑받는 프랑스인 사위랍니다.

 

 

관련 자료 찾기가 힘들지는 않았나요?

 

 

역사 연구가 힘든게 자료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것이에요.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에서 4개월을 살다시피

 

했고, 해양부에서는 3개월, 그리고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한 파리 외방 선교회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자료를

 

찾았어요. 또한 한국에 가서 서울 대학교에 있는 규장각도 자주 드나들었고, 책 표지는 서울대 도서관에 있는

 

병인양요 삽화를 허락 받고 사용했습니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었나요?

 

 

일단 외규장각의 도서를 가져간 경위를 보자면, 당시 파리는 조선 침략을 반대했었습니다.

 

멕시코, 베트남과 전쟁 중이었던 프랑스는 경제 위기에 봉착해 있었죠. 프랑스 정부의 결정이 없이는 행할수

 

없었던 것이었어요. 이에 상하이 공사는 러시아와 중국에 있는 서양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세웠고,

 

프랑스 정부는 그럼 조심스럽게 한번 가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갔다가 그냥 오지 말고, 귀중품을

 

가져 오라고 한 것입니다.

 

 

강화도는 조선 국왕의 피난처였는데 로즈 제독이 도착하자 마자 외규장각에 있는 제일 좋은 책을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은 불태우라고 했다더군요. 그렇게 프랑스군은 한달 동안 한양에 갈 생각도 없이 강화도에만 있었어요.

 

그리고 조선군이 오니 바로 중국으로 떠난 것이죠. 군인 오백명으로는 한 나라를 공격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구 임대 형식으로 돌아간 외규장각 도서에 대해서는, 몇 년만에 갱신하는 임대가 어떻게 영구임대라고 할수

 

있나?

 

 

만약 제가 반환해야 된다고 하면 프랑스 도서관에서 못들어오게 할 것이고, 반환하면 안된다고 하면 한국 도서관에

 

자료 찾으러 못가게 되겠죠. [웃음]

 

 

책 집필중인 2010 11월 한국에서 열린 G20 정상 회담에 참석한 사르코지 대통령이 외규장각 반환하겠다는

 

소식을 듣고는 맺음말을 고쳤습니다. 사학자의 시각에서는 외규장각 도서가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 문제로 인해 한국이 프랑스에 알려졌다고 볼수는 있어요.

 

 

 

 

병인양요가 한 불 관계의 시작이 아니었는지요?

 

 

관계로 보지는 않아요. 관계라면 외교가 수립되

 

어야 되어야 하는데 그건 아니죠.

 

저는 이를 만남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병인 양요 20년뒤인

 

1886년부터라고 할수 있죠.

 

 

하지만 한국과 프랑스의 첫만남은 아니었어요.

 

첫만남은 17, 18세기 중국에서 조선인과 프랑스

 

인 선교사와 이미 가졌었습니다.

 

 

 

이번에 출간한 그의 저서. 십자가. 고래 그리고 대포

 

 

 

요즘 인기 있는 프랑스의 한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한국어를 배우는 프랑스 학생들 대부분이 케이팝 때문이라고 합니다. 10년전 동양 언어 대학의 한국어과에 전체

 

생수가 40명이었는데 지금은 400명입니다.

 

한류가 없었으면 우리는 여전히 학생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학계에 남아 한국과 중국, 서양의 만남을 연구할 생각이예요. 저는 외교적인 관계 보다는 만남에 관심이 많습니다.

 

2000년도에 사학 석사를 했는데, 프랑스 사학과에는 아랍 역사는 있는데 동양 사학이 없습니다.

 

 

 

서양이 동아시아와의 만남에 매개체가 된게 바로 천주교로, 선교사와 연관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별

 

로 관심이 없었는데, 연구해보니 흥미롭더군요. 천주교는 동서양의 만남을 주선해 준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중국과 한국의 교회사를 연구할 생각입니다.

 

 

2시간정도 그집에 머무르며 역사 공부를 한듯 했습니다. 어려운 역사를 쉽고도, 구수한 한국말로 얼마나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풀어가던지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더랬습니다.

 

 

민비 아빠는 전형적인 학자였습니다. 오늘 학교앞에서 아이 찾으며 잠시 만났더랬습니다. 작은 아이가 불어로

 

이야기하니, 엄마에게는 한국말 하지? 하고는 한국말을 권하더군요. 그의 한국말 수준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넉달, 석달이라며 우리도 요즘 잘 쓰지도 않는 고유의 말을 구사하더군요.

 

 

돌아오는 길에 그의 아내인 영란씨 선조와 얽힌 일이 범상치 않게 다가오더군요.

 

 

마치 1866년 병인 양요때 조선과 프랑스간에 쌓인 앙금을 145년이 지나 이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함께 살면서

 

어진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Posted by 파리아줌마
사람 이야기2012.04.26 08:05

 

프랑스는 먹는것에 대해서 아주 까다롭습니다.

 

모든 식품들이 정부의 엄격한 공정을 거쳐 판매되고 있습니다. 워낙 먹거리 가지고 나쁜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런 당연한 것들이 이야기가 되는 세상인것이지요.

 

프랑스에서는 적어도 먹는것 가지고 장난 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무작정 건강 식품을 사지 않습니다.

 

무엇이 몸에 좋다더라 하면 체질에 상관없이 사먹는 우리와는 다릅니다.

 

정확한 정보로 성분을 분석해서 자기 자신과 맞는지 보고, 더러 주치의와 상의하고 건강 식품을 사먹

 

는다고 하더군요.

 

그런 깐깐한 프랑스가 우리의 참기름과 들기름을 건강 자연 식품으로 인정했습니다.

 

 

프랑스 농산물 개발 협회에서 주최한 세계의 기름 콩쿠르에서 우리의 참기름이 금메달, 들기름이

 

은메달을 받았습니다. 특히 오메가 3가 있는 들기름은 현재 프랑스 건강 식품업계의 시선을 끌고 있다

 

고 합니다.

 

 

지난 목요일, 남편 부탁으로 바스티유 광장 근처의 농산물 개발 센터에서 열리는 메달 수여식에 달려

 

갔습니다. 대문 안쪽에 뜰이 있는 전형적인 프랑스식 건물에서 조촐한 메달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금메달을 받은 우리 참기름이 제일 왼쪽 상테낫의 브랜드가 붙여진채 진열대안에 있습니다.

 

 

 수많은 세계의 기름들이 즐비한 가운데, 우리 참기름[Huile de Sésame Pur]과 들기름[Huile de Périlla

 

Pur]이 단아하게 나란히 서있더군요.

 

 

 우리의 참기름과 들기름이 프랑스에서 인정받게된 데는 바로, 파리에서 건강 자연 식품 매장을 운영

 

하고 있는 상테낫[Santé Nat]의 박혜정 사장님의 피나는 노력와 열정이 있었습니다.

 

상테낫은 불어로 건강 자연이라는 말의 줄임입니다.

 

2005년부터 자연 건강식품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연구하면서 매장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사장님 매

 

장에는 유자차. 생강차. 인삼차, 알로에 베라, 홍삼, 수삼까지 거의 한국것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저 또한 예전부터 사장님 매장의 차들을 즐겨먹고 있습니다.

 

사장님은 프랑스에서 출간되는 건강 잡지를 3개씩 구독하며 프랑스인들이 관심가지고 있는 건강 식품

 

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한국인의 자부심으로 우리 제품을 프랑

 

스에 소개하고자 하셨답니다. 단순히 한국 제품을 수입해와서 브랜드를 붙여 파는게 아닌 연구하고 공

 

부해서 한국 본사와의 미팅을 가지며 직접 제품 제작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식품 수입이 까다로워 르하브로 항구로 오는 한국 제품은 일단 연구소에 가서 성분 검사를

 

거쳐서 10일만에 나올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 제품을 이곳에 수입, 판매하고 있는

 

박혜정 사장님은 정말 자존심 강한 프랑스의 한국인이셨습니다.

 

 

                                                            메달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먼저 은메달을 딴 들기름, 그리고 금메달을 딴 참기름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기름에 대해서 오른쪽에 있는 협회 회장님은 전혀 모르고 있던 기름이었는데,

 

아주 좋은 품질이었다고 하더군요.

 

 

참기름은 프랑스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프랑스 업체들을 제치고 우리 참기름이 금메달을

 

딴것입니다

 

 

올리브와 씨로 만든 기름을 구분해서 메달을 수여하더군요. 이태리, 스페인, 튀니지, 프랑스 등이 있었

 

고 동양은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있었습니다.

 

 박혜정 사장님 이하 심사위원이었던 프랑스 셰프들, 협회 회장과 대사관 참사님들과, 박 사장님을

 

도운 직원들입니다.

 

 샴페인 파티가 이어졌습니다.

 

 

상장을 보고 있는 협회 회장님은 박혜정 사장님의 열정과 역동성을 칭찬하더군요.

 

그래서 우리 참기름이 어땠냐고 하니 맛이 좋았다고 했습니다.

 

 

프랑스 농산물 개발 협회는 비영리 단체로 농산물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게 목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콩쿠르에서 상을 받으면 바로 홍보 효과를 가지게 되어 상업성으로 연결된다는데요, 비영리 단체

 

에서 농산물 제작자들의 영리 추구를 도와주는 셈이지요.

 

 

박혜정 사장님은 우리나라에 이런 협회가 없는게 무척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어제 파리 15구에 있는 상테낫 매장을 찾아 사장님으로 부터 이번 성과가 있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2010년 건강 식품 박람회에서 2백여개의 기름을 전시하고 있는 부스를 보았답니다. 그곳이 바로 농산

 

물 개발 협회였답니다. 그많은 기름들 중 유일하게 들기름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들기름을 가지

 

고 가서는 당신네들이 전시한 기름들중 유일하게 없는게 바로, 이 들기름이라며 견본을 주었답니다.

 

우리 기름을 프랑스인들에게 인정받게 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자기들의

 

연락처를 주지 않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람회 동안 끈질기게 찾아갔더니 비서가 개인 명함을

 

주더랍니다.

 

 

프랑스인들은 아시아인들을 신뢰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사장님은 이야기하더군요. 그리고 들기름 두

 

병을 더 보내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나서 3개월뒤 축하한다는 이메일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엄격한 성분 분석에 합격한것입니다. 그리고는 연락을 주겠다고 했는데, 일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더랍

 

니다. 가만히 있을 사장님이 아니지요. 끊임없이 이 메일을 썼답니다. 그랬더니 지난 3월 보자고 했다

 

더군요, 그리고 콩쿠르 등록을 권했고,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 졌답니다.

 

 

사장님은 프랑스에 한국 건강 자연 식품을 수입 판매하는데 남편의 외조가 없었다면 힘들었을것이라

 

고 합니다.

 

 

남편은 프랑스인으로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모두 장성하며 막내딸은 지금 의과대 1학년에

 

재학중이라고 합니다.

 

 

박혜정 사장님의 열정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마지막에 그러시더군요,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우리

 

것을 알리고 싶은 사명감이 없었다면 못했을 일이라고요~

 

 

 매장에 있는데 끊임없이 프랑스인들이 와서 우리의 건강 자연 식품을 사가고 있었습니다.

 

단골인 쥐베르씨는 항상 구입하던 제품들을 사고는 사장님으로부터 한국 들기름이 은메달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병 더 추가로 사더군요. 한국 제품이 좋다고 합니다. 사장님은 공복에 한숟갈 먹던

 

지 샐러드에 뿌려 먹으라고 권하더군요.

 

 

 박혜정 사장님이 오메가3 가 든 들기름을 이곳에 공급할 생각을 한것은 약으로도 먹는 오메가 3인데,

 

이왕이면 음식속에 넣어 먹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랍니다. 프랑스인들에게 올리브 기름만

 

좋은게 아니고, 한국 들기름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날 손님들에게 농산물 개발 협회 콩쿠르에서 참기름이 금메달을 받았다고 하니 많이 팔려

 

3병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금 있으면 라이센스가 도착해서 진열장에 부착된다고 하더군요.

 

 

우리 농산물의 우수성과 사장님의 열정과 노력이 빚어낸 멋진 성과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네티즌이 그러더군요, 해외 동포도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라고요. 이는 바로 박혜정 사장님 같은

 

분을 두고 한 이야기 같습니다.

Posted by 파리아줌마
사람 이야기2012.04.09 06:32

얼마전 페이스북에서 소르본 대학에 다니고 있는 여대생이 한국의 포장마차를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

고 있다며 도움을 구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프랑스 여대생이 우리 포장 마차를 논문으로 쓴다고 하니 흥미로워 한번 만나 보고 싶어서

선뜻 도움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한국을 떠나온지 오래되어 저에게 포장마차는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한국에 있을때는 별로

간 기억은 없지만 왠지 그리움과 애잔함으로 다가오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여학생의 글에 더욱 끌렸던것입니다.

파리에 있는 한국인이라고 소개를 하고는 만났습니다.

포장마차에 대한 도움과 함께 블로그 포스팅을 위한 간단 인터뷰를 제안 했더니 좋다며 응해 주었습니

다.

지난 토요일[7일] 한국어 수업이 마칠 즈음 사무실로 들어선 로리안은 휜칠한 키의 늘씬한 프랑스

가씨였습니다. 여대생답게 살짝 화장을 한 모습이 참하고 예뻐 보이더군요.

부드럽고 순해 보이는 아가씨였습니다

포장 마차를 주제로 논문 준비중인 소르본 대학원생,로리안

22살의 로리안[Loriane CAILLER]은 지금 소르본 대학의 음식 문화학과 마스터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니깐 우리나라로 치자면 대학원인셈이지요. 소르본 대학에 음식 문화학과가 생긴지는 2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케이팝 팬이냐니깐 팬이라고 하지 않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음악을 듣는다고 합니다.

 

로리안은 케이팝 보다는 한국의 전반적인 문화와 역사등, 다른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

다. 케이 팝은 한국의 한부분일 뿐이고 더 많은것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한국 포장마차에 대해 도움을 줄수 있는게 단지 감성적인 부분밖에 없더군요, 어린 시절 향수,

추운 겨울,,,,또한 포장마차에 대해서 불어와 영어로도 소개가 부족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리

인터넷 검색으로 그 유래에 대해 알아보고는 로리안과 함께 보면서 번역해 주었습니다.

 

이번에 저 또한 우리나라 포장마차의 유래에 대해서 알수 있었습니다. 잠시 설명을 하자면요,

우리나라 포장마차는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답니다. 마차에 광목천을 두르고는 참새 구이와 소주를

팔았답니다. 그러다가 경제가 부흥되기 시작했던 1970년대부터 성행했다고 합니다.

 

포장마차라 함은 서민들의 지친 삶과 애환이 서려져 있는 곳이었죠. 세상사에 치여 하루를 보내고난뒤

포장마차에 들려 소주 한잔 들이키며 언 마음을 녹일수 있는곳, 주머니가 가벼워도 부담없이 들릴수

있는곳이었다는것을 설명해주는데 저 또한 짠~해져 오더군요. 그때는 소주를 반병만 시켜도 오이와

당근, 초고추장 같은 안주는 무료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때 대규모 철거 작업에 들어가면서 많이 사라졌다더

군요.

그리고 다시 일기 시작한것이 외환 위기였던 1997년이었답니다. 퇴출 당한 임금자들의 안식처가 포장

마차였답니다. 그때부터 포장마차에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고, 1만원대의 안주를 파는 대중식당으로

변모해갔다고 합니다.

 

포장마차는 한국의 상징 같아

 

로리안은 코리안 커넥션 회원으로 현재 한국 문화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곧잘 읽고 쓰더군요.

 

지난해 4월에 2주동안 한국 여행을 했답니다. 서울과 부산을 다녀갔는데 통도사에 가보았다고 하더군

요. 그리고 DMZ에 가볼 예정이었는데 문제가 있어 가보지 못했다며 아쉬워 했습니다.

로리안은 일본 드라마를 보다가 한국 드라마를 접하게 되면서 아시아 언어를 공부하고 싶어졌다고

합니다.

중국어는 너무 복잡했고, 일본어는 별로였으며, 한국어가 가장 좋았다고요. 그래서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로리안에게 한국의 포장마차는 잔치집 같은 따뜻한 분위기였답니다. 제가 지저분하고 어수선해 보이

지 않았냐고 하니 지저분하기는 파리가 더하다고 하길래 함께 웃었더랬습니다.

 

포장 마차는 한국을 관광하러온 외국인들에게는 인상적일것이라고 합니다. 로리안에게 포장마차는 한

국의 상징 같았답니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때 한국의 이미지 때문에 포장마차를 철

거했다고 하는데, 우리 포장마차에서 좋은 느낌을 받아 논문까지 쓰고 있는 외국인이 있습니다.

 

로리안은 한국음식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매운것도 잘 먹는다고요.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하냐고

니, 한국에서 먹은 오징어 바베큐가 아주 맛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한국의 길거리 음식과 연관 시키고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시장에 가서 노전에

파는 튀김을 사먹었던것, 그리고 학교 앞 담벼락에서 설탕 녹여하는 뽑기, 또한 그옆 포장마차에서

작 만두를 팔았던 아저씨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또한 뽑기와 시장 노전 음식은 저의 엄마가 비위

생적이라 무척 싫어했다는 것까지요..

특히 뽑기는 부스럼 난다며 협박까지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로리안은 포장마차의 닭발은 도저히 못먹겠더랍니다.

 

4월 말에 파리에서 있을 코리안 커넥션 페스티발에 포장마차 부스를 만들 계획이었는데, 이번에는 안

될것 같다며 다음번에는 꼭 준비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로리안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시간적인 한계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하고는

헤어졌습니다. 케이 팝과 드라마가 아닌 우리 포장마차에 대해 프랑스 젊은이와 이야기 나눌수 있어

아주 좋았답니다.

 

요즘 포장마차는 원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버린듯합니다만, "비닐 한 장으로 세상과 구별된 그곳에서

노동자들은 ‘전쟁 같은 밤 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박노해 ‘노동의 새벽’ 중

에서)를 붓고, 서민들은 ‘가슴 밑바닥의 이야기, 혼자 견뎌내는 이야기, 서로의 생을 묵묵히 인정할 수

있을 때만 말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임영태 ‘포장마차’ 중에서)를 나누는 곳" 이었지요.

Posted by 파리아줌마
사람 이야기2011.03.08 02:35

직지 고증과 외규장각 연구한 박병선 박사 인터뷰  

< 알려지지 않은 그분의 이야기>

  

145년만에 외규장각이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비록 영구임대라는 어설픈

딱지가 붙었지만 우리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건 반가운일입니다.

하지만 그뒤안에는 반평생을 바쳐 직지고증과 외규장각을 발견하고,

연구한 박병선 박사님의 외롭고 지난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쓴소리 한마디하렵니다. 우리 문화유산 안돌려준다고 프랑스 비난만

할줄 알았지, 이런 분의 숨은 노고가 있는줄은 알았는지요?

알려고는 했는지요? 가끔식 제가 프랑스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련도 없는 글에다 우리 문서 안돌려주는 프랑스를 비난한 댓글을

남기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무척 씁쓸하더군요.비난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런 분의 노력을 알려고 하는 일은    단순히 비난만하려는 마음으로는 쉽지 않을것입니다. 욕을 해도 전후좌우, 깊은 사정까지 잘 알고 하자고요.

그럼 비난이 비판이 될수 있을것이고, 비판이 된다면 변화할수 있는 힘을 가질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랑스 유학생 1호 박병선 박사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 고증으로 동백상을 수상한 "직지의 대모",

박병선 박사님은 625전쟁이후인 1955년 프랑스로 유학을 왔습니다.

 

은사의 부탁으로 파리에 있던 외규장각을 찾아 나라의 어떠한 지원도 없이 외로운 연구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1979년에는 한국에 외규장각을 알렸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아 도서관 사서일을 그만두기도 했었습니다. 

반평생 연구에만 몰두하여 나라의 잃어버린 역사 한쪽을 찾아주는 업적은 이루었지만 그분은 후회하는게 두가지가 있답니다, 하나는 결혼을 하지 않은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교수제의가 들어왔을때 받아들이지 않은것이랍니다. 그분이 선택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분의 삶을 대하는 저는 그저 감사하고 죄송스런 마음이 듭니다.   

 

지난해 한국에서 암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여든 연세에 수술이 힘겨우셨지만 다시 일어나 파리로 돌아와 연구하고 계십니다. 어떠한 병마도 그분의 열정을 막을수는 없습니다. 현재1919년 파리 강화회의 당시 독립을 호소했던 김규식 박사 일행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독립기념관 건립을 계획하고 계시며, '왜 한국 사람들이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해 달라.'고 요구하는지 등을 프랑스어로 자세히 설명한 '조선조의 의궤' 증보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외규장각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이제는 알려도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그간 숨겨왔던 고충을 동포신문을 운영하고 있는 남편에게 털어놓으셨습니다. 지난주 삼일절 기념식이 파리의 한국 문화원에서 있었는데, 박사님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셨다고 합니다. 그날 남편이 인터뷰한 것입니다. 다소 길지만 어느 한말씀 놓치고 싶지 않더라고요.

 

 

                                                                                           파리의 자택앞에서,, 박병선 박사님

 

박사님, 병을 이겨내시고 파리로 돌아오셨습니다.

 

파리의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몰랐어요. 결코 저 혼자 병을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에 천주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셔서 그래, 이번 한번만 봐줄게하신 것 같아요. 의사도 수술을 하면서 처음에는 3시간 내지 3시간 반이 예정되었던 것이 7시간이 걸리니까 나중에는 다리에 쥐가 나서 못 견딜 정도였대요. 이 할머니가 이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수술대에서 죽으려니 각오를 했대요. 그런데 살아나니, ‘참 명도 기십니다하시더라고요 (미소). 내 명이 긴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정말 진심으로 기도 드려주시고, 도와주시니까, 그 덕분에 천주님께서도 이렇게 까지들 하는데 내가 좀 돌봐주면 되겠다하고 놓아주신 거라 생각해요. 이렇게 지금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에 참 감사하죠.

 

직지 고증과 외규장각 도서 연구에 거의 30년이 넘는 세월을 매달리셨는데, 그 뒤에 숨은 이야기가 참 많을 것 같아요.

 

숨겨진 역사가 어디든 다 있죠. 학생신분으로 좋은 조건도 아니었지만, 직지 고증 당시 당했던 고충이라든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외규장각 도서를 연구하면서 겪은 고생 등 에피소드가 너무나 많아요. 이야기 거리가 많죠. 시간과 경우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것을 이제는 숨겨놓지 않고 공개하고 싶어요. 이런 숨겨진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비밀스러운 이야기, ‘비화란 표현이 맞을 것 같네요. 직지고증과 외규장각 도서를 세상에 드러내기까지 뒤에서 고생했던 이야기가 되겠죠. 지금은 외규장각 도서네, 직지네 결과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만, 당시 학자들의 냉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요. 어떤 교수님께는 조언을 구했더니 밥 먹고 할 일이 없으면 잠이나 자라고 하신 분도 있어요. 불란서 사람들의 냉대는 이해하지만, 한국 학자들의 냉대는 더 차갑고 매서웠어요.

 

직지고증을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었나요?

 

직지 고증을 시작한 것은 1972년 때 일이에요. 당시 직지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에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불란서 사람들은 혹시 이것이 진짜 고활자본이라면, 역사적인 공헌이 크다라면서, ‘-Si c’etait이라는 표현을 썼죠. 당시 누구나 조건적으로 자를 붙였어요. 그러면 좋다, 자를 면하게 하면 되지 않느냐 했지요. 하지만 그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에서 시작을 하려니, 어떻게 하면 이 자를 면하게 할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였어요. 도대체 한국의 활자사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그것의 흐름을 알아야지 무엇을 어떻게 말을 건넬 수 있을 것 같았죠. 한국의 학자들과 교수님들께 열 통도 넘는 편지를 보냈을 거예요. 한국의 활자사나 활자에 관련된 책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요청을 드렸죠. 그런데 이에 대한 답신을 전혀 받을 수 없었어요. 고맙게도 어떤 한 교수님께서는 답변을 주셨는데, 며칠을 두고 찾아봤지만 그런 책이 없다는 대답이었어요. 그렇게까지 라도 알려주신 교수님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었죠. 당시 불행 중 다행으로, 일본과 중국의 인쇄사 관련 책을 찾을 수 있었어요. 제가 일어도 그렇고 중국 한자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어서, 그때부터 그것을 파고 들기 시작했어요.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했죠. 어떤 때는 눈이 시뻘개져서, 아침에 근무하러 도서관에 가면, “너 어제 울었니?” 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 약국에서 안약을 사서 넣으면 며칠 있다 또 괜찮아지고, 그러한 일상이 반복됐죠.

 

직지 고증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나요?

 

한 가지, 한국 활자사를 추측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활자사를 참고해야 할지 일본 활자사를 참고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어요.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활자사 같은 것은 직접 관계되는 것은 아니니까 놔두기로 하고, 이것이 진짜 고활자본인지 아닌지가 문제니까, 이것이 금속활자라는 것만 고증하면 된다는 생각에 활자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지우개로도 만들고, 감자로도 만들고, 흙으로도 만들고. 그때만해도 불란서에 세라믹을 굽는 오븐을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부엌에서 쓰는 오븐에서 구우면, 세라믹 오븐에서 구운 것처럼 되지는 않을지언정 형태가 조금은 나왔어요. 글자 몇 개를 흙으로 만들어서 굽기를 반복했더니 나중에는 오븐이 하고 터져서 부엌 유리창이 다 깨지고 얼마나 놀랬는지. 주인에게도 욕깨나 먹었죠. 그런데 그 때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인쇄소에 가면 예전에 금속으로 만들었던 활자들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생각했어요.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을 미리 생각을 못하고 나 자신이 활자를 만들어서 어떻게 해서든 증명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인쇄소에 부탁한 금속활자를 가지고 직접 잉크에 찍어보면서, 직지에 찍힌 글자를 확대한 것과 내가 찍은 활자를 비교해봤더니 이것이 토활자인지, 사기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금속이나 납 같은 것으로 만든 것인지를 판단할 수가 있더라고요. 이렇게 쉬운 것을 활자를 스스로 만드느라 죽으라고 고생을 하고 돈은 돈대로 쓰고 화덕을 세 개나 깨트렸으니.

 

직지가 금속활자라는 것을 확증하게 된 것이네요.

 

인쇄소에서 받은 금속활자를 찍어본 것과 책에 찍힌 활자의 형태가 동일한 것을 보고, 이것이 금속 활자라는 것을 확증을 한 것이죠. 하지만 이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어요. 조건이 있었죠. 예전에는 조판이 쉽지 않으니까, 앞의 글자가 뒤의 글자와 물린 것도 있고, 삐뚤어진 것도 있어요. 삐뚤어진 것이나 물린 것을 하나하나 꼬집어서 확대해서 대조해보니, 그것이 모두 정확히 일치했어요. 금속활자가 아닌 붓으로 썼거나 나무로 팠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그렇게 해서 그 대조표와 사진을 가지고 직지가 금속활자라는 것을 확증을 했죠.

 

그 때는 어떤 심정이 드셨는지.

 

사실 겁이 났어요.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이것을 그렇게 대담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당시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도서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대담하게 직지가 ‘1377년에 금속으로 만든 활자본이라고 썼어요. 이제까지 ‘-Si c’était라는 가정이 붙었던 것에서, ‘Si’를 과감히 뺐더니 도서관에서도 겁이 나니까, 나보고 어떻게 이렇게 대담한 짓을 하는지, 이것이 금속활자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했어요. 도서관 측에서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도서관 명예로 돌리지만, 이것이 잘못되어 실수라면 그것은 내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겠다는 조건을 붙였어요. 나 개인이야 실언 했다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전시를 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까지 조심성 있게 전시를 진행했어요. 전시가 시작되고, 이를 본 인쇄업자들이나 그쪽에 관계가 있는 분들로부터 구텐베르그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그것보다 78년 앞선 시간에 한국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고 항의가 왔어요.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나는 이것이 어떻게 해서 금속활자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그 경우만 딱 설명해주었죠. 그랬더니 나중에는 그래, 네 말도 옳다’, ‘알아들었다라는 반응과 함께 처음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어요.

 

직지 고증 3년 동안 정말 많은 노고가 있었을 것 같네요.

 

나는 그것을 위해 3년 동안 거의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며 지냈어요. 시간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먹으려면 장을 봐야 하는데 장을 보러 나갈 시간이 없었어요. 그러니 매일 물만 끓여서 커피하고 빵하고 먹는 게 보통이었어요. 머리가 딴 데 있어서 장을 보러 가도 하나만 사고는 다 샀다고 생각하고 돌아오기가 일쑤였죠. 얼마나 나 자신이 답답했겠어요. 너 같은 맹꽁이도 없다 생각했어요. 이렇게 산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이렇게 살아도 살아는 나더라고요.

 

당시 한국에서의 반응은 어땠나요?

 

동양학자회의 때 발표를 하고 나니, 한국의 반응은 냉담했어요. 어떤 학자는, 서지학도 안 한 사람이 왜 서지학에 손을 대느냐, 그리고 그런 고증을 한국 서지학자들도 못했는데 어떻게 네가 자신만만하게 그런 소릴 할 수 있느냐, 네가 했다고 하지만 그건 한국 학자들이 다시 보고 판단을 해야 하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한 것이라고, 그렇게 나오더라고요. 그 편지를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당시 너무 화가 나서 찢어버렸어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가 당시 어떤 기분이 들었겠어요, 몇 년 동안을 고생해서 고증하고 발표를 해서 인정을 받은 다음의 이야기인데, 그런 소리를 하면서 항의가 들어오니. 나중에 직지 영인본을 내기 위해 한국에 갔을 때, 한국 서지학자들에게 내가 고증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가 이렇게 고증을 했다는 것을 발표했더니 그분들이 화를 내는 거예요. 그리고 영인본 서문에는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병선이 가지고 온 사진을 한국의 서지학자들이 고증해본 결과 이것은 금속활자라고 인정했다라고 적었어요. 나는 완전히 심부름꾼이 되고, 그분들이 다 했다고 된 것이죠. 내가 교수님께 가서 너무하셨다고, 그리고 그 한마디만 고치시라고, ‘한국의 서지학자들이아니라 한국의 서지학자들도 금속활자라고 인정했다고 고쳐달라고요. 하지만 못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아직도 그 해설문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프랑스에서의 반응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당시 출판된 영인본이 파리 도서관에 왔는데, 도서관 과장이 불어로 된 해설문을 보더니 이것을 읽어봤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알면서도 안 읽었다고 얘기하니까, 이게 말이 되느냐고, 네가 고생해서 우리 도서관에서 발표를 하고 인정을 받은 것인데 저희들이 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불어 같은 경우는 말 마디가 시원찮게 번역이 되어 더 심하기도 했어요. 도서관 측에서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고, 고소를 하겠다고 나왔어요. 그때 드는 생각이 아무리 그래도 내 나라 교수들인데, 소위 그분들을 국제 재판에 내세우는 것은 너무하다고, 지금 너희들은 영광을 다 차리지 않았느냐, 세계 최고 활자본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다는 것, 소유권도 너희에게 있다는 것만도 크지 않냐며 설득했어요. 나는 곧 있으면 갈 사람이지만, 그것만은 영원히 남는 것이니, 그것을 봐서라도 참으라고 했죠. 동시에 이것이 서울에 있었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고, 소위 너희 도서관 서고 속에 있었으면 그대로 있었을 걸, 내가 꺼내 고증을 해서 발표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증명이 된 것이 아니냐, 그러니 도서관 쪽에서도 영광이요, 나도 인간적으로 기쁨이다,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말자고 했죠. 이 후 한국에서도 소식이 없고 해서 일이 일단락 됐어요.

 

청주에 있는 고인쇄박물관은 어떤 계기로 설립된 것인가요?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 전두환 대통령이 파리를 방문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엘리제궁에 돈을 빌리러 왔대요. 들어갈 적에는 땅만 쳐다보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서 성공하나 하고 머리를 푹 숙이고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들어갔더니 미테랑 대통령이 직지 영인본을 탁 내놓으면서 이렇게 훌륭한 문화를 가진 국가의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인사를 먼저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전 대통령도 당신도 잘 몰랐다가 용기를 내게 되었고, 회의도 잘 끝나고 결과도 좋았다고 해요. 엘리제궁에서 나오는데 들어갈 때와는 달리 어쩌면 하늘이 그렇게 푸르고 아름다운지 모르겠더라고 하는 회고담을 들었어요. 그런 일이 있고 대통령이 한국에 돌아온 다음에 직지가 만들어진 청주에 고인쇄박물관 설립을 지시하게 된 거예요. 이런 이야기는 못 들어봤죠? (미소)

 

외규장각 도서와 관련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연구에 매달리신 기간만해도 10년이 넘는 것으로 아는데요. 297권에 달하는 외규장각 도서를 정리하는 작업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외규장각 도서는 너무도 역사가 길어요. 무려 30여 년에 걸친 이야기죠. 외규장각 도서가 있다는 것은 1977년에 알았어요. 1979년도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외규장각 도서 목록과 제목을 정리해서 기자들에게 병인양요 때 약탈된 도서들이 이런 것이다 하고 알려줬어요. 당시 바짝 관심을 갖다 그만이었죠. 하지만 책의 제목만 알았을 뿐이지, 내용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용을 알고 이를 요약을 해서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해서 10여 년에 걸친 조사가 시작된 거예요. 그때부터 10년 간을 아침 10부터 저녁 5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조사를 하는 거예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지만 문제는 책이 크기도 하고, 297권에 달하는 만큼 장 수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의궤의 내용을 잘 못 알아 듣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소위 이조시대 이두(한글 발음을 한자를 빌려 적은 것)가 섞여 있어서 한문을 아무리 해석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예를 들어 예단 관련 내용에 저고리가 있다면, 저고리의 자를 한자를 골라서 쓰는 거죠. 빨간 ()’ 자를 쓰고, ‘자는 고대라는 ()’, ‘, 몇 리 하는 ()’를 적어 적고리(赤古里)’ 라고 써 놓았으니, 이것이 옷 이름이라고 누가 상상을 하겠어요. 이런 것에 하나하나에 잡히다 보니, 10년 이라는 시간이 가는 것이죠.

 

시간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고충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요약한 내용을 불어로 타이핑을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고, 내가 백만장자도 아니고 돈이 없으니까, 이것을 타이핑하는 분께 맡길 때마다 우리 집 골동품을 한 개씩 갖다 파는 거예요. 당시 내가 알던 골동품 가게가 있는데, 할아버지 세 분께서 계셨어요. 그 중 한 분이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어요. 골동품을 의탁을 해 놓으면 팔리면 연락이 오는데, 원칙적으로 당신 몫을 챙기시고 나를 주시는데, 어떤 때는 너를 보니 내가 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다. 얼마에 팔았으니 다 줄게 가지고 가하시고, ‘네 꼴을 보니 너무 안됐으니까 집에 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라고 그러셨죠. 그 분께서 돌아가셨는데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라요. 그 할아버지께서 나를 제일 많이 도와주셨죠. 또 옛날 빨레 후아얄 Palais Royal 근처에 일본 판화 파는 집이 있었어요. 당시 이를 운영하던 분이 국립도서관에 판화가 많으니까 판화를 보러 오셨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내게 통역을 부탁했어요. 이렇게 해서 알게 된 분인데, 판화의 경우 구멍이 있으면 값이 툭 떨어지니까 그것을 감쪽같이 고쳐야 해요. 그것을 내게 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주말에는 그곳에 가서 판화를 고쳐주는 거예요. 그 분도 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하기보다는 예술가 기질이 있어서, 오늘은 30유로 줘야 하는 것을 어떤 때는 50유로 주고, 어떤 때는 300유로를 주고 그런다고요. 그리고 당시 일을 하면서 점심, 저녁을 주인이랑 같이 먹어야 하니까 밥을 먹는데, 밥을 안 먹다가 먹으니 크게 배탈이 나는 거에요. 한번 두면 나면 모르는데, 월요일에 도서관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화장실을 계속 들락날락하니까 수위가 이걸 보고 약을 줘서 먹고 나은 적도 있어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원고를 완성하게 되었죠.

 

출판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나요?

 

이것을 요약해놓고 가지고 있으면 소용이 없죠. 출판을 해야 하는데, 그 때 개인적으로 알던 대사관 영사님께 말씀 드리니 다른 방법은 없고 민원을 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민원을 냈더니 규장각에서 이태진 교수님이 이를 받아주셔서 그곳에서 불어판을 출판을 하게 됐어요. 당시 직판사를 지적해주셨는데, 문제는 불어로 된 텍스트라 그들이 찍기를 힘들어 했어요. 그래서 오자가 많았죠. 이것을 한 열 번은 고쳤을 거예요. 그래도 또 틀리고 또 틀리고, 지금도 오자가 투성이예요. 나중에는 할 수 없어 그대로 놔두었어요. 당시 출판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이태진 교수님이 총장께 말씀 드려 반환운동을 시작하게 된 거에요. 그런데 그것도 참 반대가 많고. 처음 시작할 당시 밥 먹고 할일 없으면 잠이나 자라고 하신 분은, 내가 미워 죽겠다고, 하지 말랬는데 이렇게 쓸 데 없는 일을 해서 남 골치 아프게 만든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 때는 이메일도 없으니까 편지나 전화로 그런 소릴 들어야 했죠. 어떤 때는 아침에 출근하려고 하는데 이런 전화를 받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어요. 당시 그렇게 냉대했던 분들이 지금은 그런 말들이 다 없어지고 앞장서시는 걸 보면 사람이 저렇게 간사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냉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고 해내셨네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병도 교수님께서 나에게 간곡히 부탁하시지 않았으면 난 중간에 그만 뒀을 거예요. 그 분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을지언정, 생전에 저에게 그렇게 간곡히 부탁하셨던 그 말마디가 저에게 큰 힘을 준 거예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하나 못 들어주겠어요. 그래서 끝까지 버텨냈죠.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저도 모르게 갔어요. 저는 아침에서 저녁 밖에는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1년이 가고 2년이 가더니,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죠. 하루하루 진행이 되어가니까 나는 계속 파고 있는 거예요. 오죽하면 그 쪽 도서관 열람실에서 내 별명이 파란 책 속에 묻혀 있는 여성 이겠어요. 의궤 표지가 파랗거든요. 그리고 책이 크니까 나는 그 책을 펴 놓고 밑에 묻혀 있으니까. 그래서 어디 조금 나가 있으면, 이름도 뭐도 모르고 파란 책에 묻혀 있는 여성 어디 있냐고 그렇게 물었다고 해요. 그렇게까지 됐었어요. 그래도 해냈어요. 시간이 아까워 식사도 못하며 일하고 있는데 어느날 양기섭 문화원장이 방문하여 잠시 나가자고 하여 나갔더니 도서관 근처 까페에서 오믈렛을 시켜주시더라구요. 그 분주하신 분이 도서관에 까지 찾아오시는 것도 고마운데 식사까지 시켜주신 그 마음이 고맙고 잊을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방해하고 냉대하는데 오직 한 분 문화원장님께서 베풀어주신 따뜻한 정을 너무나 감사하며 잊지 못하지요.

 

의궤가 145년 만에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보시는 기분이 남다르실 텐데요.

 

우리나라 의궤의 소유권을 못 찾고 대여로 온다는 것이 너무 맘이 아파요. 그 책이 어디 있든 간에 우리나라 것이라는 소유권만은 찾고 싶다고요. 그것이 우리 것이라면 어디에 있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것은 불란서 것을 빌려오는 것 아녜요. 5년 후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요. 정권도 바뀌고,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줄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서류 상 돌려 달라는 말을 안 하겠다고 썼다고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일이죠.

 

현재는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병인양요 1권은 이미 출판이 되었으니, 지금은 2권을 집필하고 있어요. 하지만 애로가 많고, 그것도 쉽지가 않아요. 다행히 문화재청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최대 노력하겠다고 하니까 두고 보는 것이죠. 1권은 의궤에 대한 설명이 주가 되었다면, 지금 하는 작업은 병인양요 발발 전과 그 후 프랑스 정부에 보고된 공문 등을 찾아 번역하고 재확인하는 것이죠. 당시 참전했던 사람들이 와서 쓴 논문과 보도 내용을 몇 개 찾아냈는데, 아직 다 찾지 못했어요. 1866년에서 1867년까지의 신문을 하나하나 보면서 기사가 있나 없나 찾아야 되기 때문에 매우 힘든 작업이에요. 그것을 다 못해서 섭섭한 마음이 들고, 그것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 이런 것을 전문으로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데 돈이 많이 들죠.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면, 우선 그것부터 전문가에게 부탁하여 보다 더 충실하게 보충하고 완벽한 책을 만들고 싶어요.

Posted by 파리아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