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남쪽으로 백여킬로 정도 떨어져있는 오를레앙[Orléans]이라는
도시는 15세기의 백년 전쟁 당시 프랑스를 구한,
쟌 다르크[Jeanne d'Arc]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던 프랑스를 18세의 소녀인 쟌 다르크가 나서서 역전승을
시키게 되지요.
그래서 오를레앙의 소녀, 쟌 다르크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그곳에 유명한 대성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를레앙하면 쟌 다르크와 대성당이 생각이 나곤 했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연결점을 알수 있었습니다.
단아하고 깔끔해 보이는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무서우리 만큼 거대한
성당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가끔씩 너무 웅장한것을 볼때에 인간의 제한적인 눈으로 넓이와 높이를 가늠하려다 보면 벅차게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비록 간접적이지만 수려한 골짜기나, 광대한 사막을 접할때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너무 웅장해서 무서움이
엄습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건 자연이 만들어낸 것들이지만 인간이 지어낸 대성당을 봐도 심장이 터질것
같은 느낌을 경험 하곤 하는데요, 비록 예전에 많은 기독교의 비리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인간의 힘으로
가늠할수 없는 그무언가가 있는듯 합니다.
쟌 다르크 생가가 있는 거리에서 바라다본 대성당입니다.
이렇게 멀리서 보면 멋진 모습인데 말입니다.
대성당의 측면을 보면 도시 전체를 휘어잡고 있는듯합니다.
제가 그날 놀랐던게 대성당의 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숨을 한번 깊이 들이 쉬었습니다.
그만 놀라고 성당안으로 한번 들어가 봅니다.
제 눈에는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보다 더 웅장하고 큰것 같았습니다.
이곳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고딕양식 주교좌 성당이랍니다.
까데드랄 생트 크루와 오를레앙[Cathédrale Sainte-Croix d'Orléans]으로 불리운다고 하는데요,
1278년에 공사를 시작해 1329년에 완공하였고,
1568년 대성당의 일부가 파손되어 1601년부터 1829년에 걸쳐 복원 공사를 하였답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은은한 음률에 젖어 성당안을 돌아보았습니다.
원래 오르간이 있는곳은 성당 뒷편이죠.
음악이 너무 좋아 사람들이 저렇게 오르간쪽을 보며 잠시 앉아 있다 가곤 하더라고요
오를레앙 대성당
오를레앙 대성당
쟌 다르크를 상징하는 동상입니다.
동상 밑에 적힌1429는 쟌 다르크가 오를레앙에 도착했던 년도입니다
오를레앙 대성당은 쟌 다르크와의 인연으로 유명한 장소랍니다.
이 프랑스의 여걸은 1429년 5월 2일 오를레앙 공성전에서 승전한 후
이곳 오를레앙 대성당에서 거행된 저녁 미사에 참례하였다고 합니다.
그옆에는 1, 2차 대전시에 사망한 미국병사를 기리는 문구도 있었습니다.
오를레앙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에는 성녀, 쟌 다르크의 일대기가 묘사되어 있다고 하던데요,
말을 탄 그녀의 모습인듯합니다.
오를레앙 대성당
오를레앙 대성당
웅장한것에 비해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그런지 더욱 커보입니다.
오를레앙 대성당
성당안에 망자들을 안장해 놓은듯 합니다.
한쪽에서는 그림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성녀, 생트 테레사의 이미지가 새겨진,,, 촛불[?]이라고 해도 되는건지??
친구들과 학교에서 여행온 아이 같았는데, 쟌 다르크 동상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고개 들어 높디높은 성당의 천장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대성당에 가보면 항상 느껴지는게,
그안에 깃든 성스러움과 엄숙함에 반해 당시 기독교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약자들을 탄압했을까 하는
생각이 엇갈리게 들곤 합니다.
그게 바로 대성당과 쟌 다르크의 묘한 인연이기도 할겁니다.
프랑스를 승전으로 이끌고 난뒤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쟌 다르크는 성당의 주교에 의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에 처하게 되지요.
거기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단지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들만이 있었을뿐이지요.
이렇게 거대한 대성당을 보고 느낀 무서움은 성스런 그무엇이라기 보다는 한계를 가진 인간이 할수 있는
무한대의 악함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안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함과 비난, 부정 등
종교적이라고 할수 없는 것들이 있어 왔으니까요.
대성당앞에 있는 박물관에 걸려 있는 쟌 다르크를 그린 작품입니다.
오를레앙 시내에 있는 쟌 다르크 동상이고요~
1429년 4월 29일 쟌 다르크는 영국군의 포위를 받은 오를레앙 요새에 도착했습니다.
오를레앙 백작은 쟌 다르크를 못마땅하게 여겨 작전 회의나 전투에 참여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쟌 다르크는 사령관의 지시를 무시한 채 마을로 내려가 주민들을 설득해 지지를 받은 후 스스로 깃발을 들고 최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녀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는 오를레앙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쟌 다르크는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중무장을 한 채 군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후에 쟌 다르크는 법정에서 칼이나 창을 들기는 했으나 직접 무기를 사용하기보다는 깃발을 들고 독려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프랑스군에게 두터운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샤를 7세가 그녀가 영국군에 넘어가도록 방관한 것은 그녀의 압도적인 인기에 위협을 느껴서였다는 설도 있다고요~
5월 23일 잔 다르크는 콩피에뉴에서 요새를 방어하다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는데, 부르고뉴 공작 필립은 프랑스 정부에 몸값을 제시했으나 샤를 7세는 이를 방관했고, 이에 주교에게 넘겨져 종교재판에 회부되게 됩니다. 주교는 그녀가 혐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강행했습니다. 여자가 바지를 입었다는것 하나로 그녀는 마녀가 되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오를레앙 시내에 있는 쟌 다르크 생가입니다.
그녀가 1429년 4월 29일에서 5월 9일까지 머물었던곳인데요
앞의 도로가 공사중이라 내년 4월까지 문을 닫는다는 글귀를 보고는 아쉽게도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쟌 다르크의 종교 재판은 그녀가 정말로 마녀인가, 성녀인가를 판가름하는 재판이 아닌,
영국의 보복이자 정치적인 모략이 개입된 일종의 연극이었다고 합니다.
이상한건 그녀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던 재판관들이나 성직자들이 이후
행방불명되거나 요절했다는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코숑 주교는 쟌 다르크의 화형 이후 면도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답니다.
샤를 7세는 1456년 7월 7일 명예 회복 재판을 열어 쟌 다르크가 무죄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1920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쟌 다르크를 성녀로 시성하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마녀가 아닌 성녀였습니다.
오늘 쟌 다르크의 생애를 살펴보니 죽음을 뛰어넘는 성스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녀의 명예는 회복되고 성녀가 되었지만, 6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정과 정치적인 모략은 계속되고 있다는것을 잊지 말아야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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