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살면서 바다를 보려면 200킬로 정도 떨어진 도빌, 아니면 국도로 꼬불 꼬불, 프랑스 전원 풍경을 만끽하며 갈수 있고, 도빌 보다는 조금 더 먼거리에 에트레타가 있다.
여행 책자에서는 깎아지른 절벽의 노르망디 해안이라는 타이틀로 풍경들이 나왔던 것 같다.
그 먼 옛날 영국과 프랑스를 구분하는 도버 해협이 생길때 "쩍"하니 갈라져, 마치 케익을 손으로 두동강 낸 느낌의 절벽들이 마을과 바다를 끼고 가볍지 않은 모습으로 서있다.
바닷가는 모래밭이 아닌 자갈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파도로 인해 얼마나 저들끼리 많이 부대꼈는지 너무나도 곱게 다듬어져 있다.
큰 언덕 두개 사이로 소박한 바닷가 마을이 있는데, 예전에는 철도가 다녔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운행은 멈추어졌고, 조그마한 역청사만이 쓸쓸하게 남아있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의 무대였기도 하고 19세기 말엽부터 인상파 화가들과 작가들이 이곳의 경치에 이끌려 자주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의 가장 고급 호텔이 별 3개밖에 되지 않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볍지 않는 무언가를 품고 있을 듯한 이곳을 한 몇년간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다녔다.
특히 나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때 마다 우리 가족들은 이곳이 마치 고향인듯 찾아들었다.
유진이를 낳아 키우고 있으면서 육아가 너무 힘들어 둘째를 차일 피일 미루다가 2000년말 이제는 가져야지 싶을때 감사하게도 둘째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만 임신 초반에 유산이 되고 말았다.
유산이 나에게 가져다 주는 정신적인 충격은 컸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이 막 커질때 가졌던 아이라 기대가 컸기에 상실감은 더했다. 매일 매일 응답주시고, 깨닫음 주셨던 와중에 일어난 일이라 이해가 되지 않아 주님께 "왜 그러셨냐?"고 물어보니, 그렇게도 따스히 나를 품으셨던 분이 등돌리고 싸늘하게 냉대하시던 것 같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래 역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구나", 유산 보다도 내가 믿었던 것에 대한 절망감과 상실감이 더 했다.
남편은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여행을 제안했고, 차에서 불편하지 않도록 이불들 가지고 편안한 상태로 에트레타로 향했다.
남편은 워낙 여행 다니기를 즐겼고, 특히 바다를 좋아했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좀처럼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나는 남편을 만나 여행의 묘미를 알아가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힘들어 별로 내키지는 않았으나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남편은 바닷가에서 큰 아이랑 마치 9살짜리 소년처럼 뛰어다녔다.
마을과 바닷가가 내려다 보이는 호텔 방에 앉아, 무척 외롭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볍지 않은 마을의 풍경이 나를 기분 나쁘지 않게 더 가라앉게 했었고, "다 안다"면서 포근히 나를 감싸는 듯했다.
믿음은 바로 회복되었고, 허풍선 같았던 나의 믿음은 일대일 제자양육 등, 말씀을 통해 채워지고 있었다. 그와중에 다시 둘째를 가지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아이는 모태의 신앙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가진 서진이라 너무 감사했고 소중했다.
2002년 서진이가 태어나고, 이곳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다.
7살 유진이
그리고 이곳은 남편의 사업 실패 이후 찾았던 곳이다.
경험도 없고,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우리들이 파리 에펠탑 근처에 골프 샵을 차렸다. 3년간 밑빠진 독에 물붓기를 거듭하다가 남편은 샵을 다른이에게 양도했다.
그당시 예민해진 남편은 잠시 휴식을 취할겸 이곳을 다녀오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아무소리 없이 따라나섰다.
아이들이랑 살아갈 길이 막막했지만 마치 이곳을 찾으면 뭔가 답을 얻을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또다시 이곳으로 향했다.
남편은 나름대로 이곳을 여행 상품화할 것과 골프 투어 등을 고려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몇년 동안 여름 휴가는 항상 이곳에서 보냈다.
2003년 프랑스 전체의 폭염으로 노인들의 사망이 많았을때도 40도 넘어서는 파리의 폭염을 피해 이곳에 왔었을때 22도에서 24도 정도의 기온으로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고등학교때 생물 선생님이 10대인 우리를 보고, 선생님은 지난 날을 추억하는 맛에 살고, 우리는 이제 펼쳐질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간다는 말씀이, 문득 30대를 넘어 40대에 접어든 요즘 많이 생각난다.
그말씀하신 선생님은 현재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실까?
제목을 "에트레타 기억"으로 할지 "에트레타 추억"으로 할지 잠시 망설였다.
기억은 머리만이 인지하는 것 같고, 추억은 머리와 가슴이 함께 인지하는 것 같다.
유산의 아픔도, 사업 실패도 어떤 이유에서 나에게 허락되었는지 알았고, 둘째 서진이가 건강히 크고 있고, 다시 일어나 열심히 사업장을 꾸려가고 있는 남편이 있기에 그때의 아픔들은 나의 그리운 추억속에 소중히 간직된다.
서진 2살때 우유살이 장난이 아님, 배경 오른쪽에 에트레타의 상징인 코끼리 절벽, 왼쪽은 골프장
남편
인터넷 통해 찾은 에트레타 코끼리 절벽, 사진이 너무 멋있어 하나 올려본다.
'파리의 한국아줌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랑스 SG은행 금융 사기 사건을 보며 (0) | 2008.02.02 |
---|---|
파리지엔 한국 아줌마 (0) | 2008.01.30 |
우리들의 사르코 (0) | 2008.01.23 |
프랑스에서 음악 과외 (0) | 2007.12.22 |
파업 때문에 피곤해 (0) | 2007.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