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델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에서
지난 주말에 벨기에를 거쳐 네델란드, 로테르담과 헤이그를 다녀왔습니다.
남편 일 때문에 떠났던 길이었는데, 아이들 방학인지라 따라 나섰습니다.
토요일에 남편은 일하게 내버려 두고 아이들과 헤이그를 관광했습니다.
무엇보다 헤이그 밀사였던 이준 열사 기념관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오전에 한군데 다녀오면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던터라 배터리가 없어
헤이그 시내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충전하면서 간단히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전날 로테르담에 계신 이욱현 회장님께
들은 이준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는 기념관을 찾아 나섰습니다.
사실 저도 이준 열사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습니다.
헤이그 밀사라는 정도만 학교에서 배워 알고 있었지요.
첫걸음에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 아무리 가도
기념관 주소가 나오지 않습니다. 할수없이 버스정류장에 있는 마음씨 좋아보이는
어떤 아저씨에게 기념관과 접하는 큰 길 주소를 물으니, 한블럭 더 가야된다고 합니다.
못미치는데서 꺾어들어왔던것입니다.
영어도 화란어도 못하지만 손짓과 표정, 거기다가 눈치까지 가세하면 만국 공통언어가 될수 있습니다.
친절한 헤이그 아저씨는 지름길을 가르쳐줍니다. 아마 어쩌면 우리가 한국인인줄 알고
그길로 안내해주었는지도 모를일입니다. 지름길로 들어서자마자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만날수 있었습니다. 지척에 두고 찾지 못하고 있었던것입니다.
이역만리 네델란드, 헤이그 시내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보자마자 기념관 방문이
심상치 않게 다가올것 같았습니다.
치욕적인 역사의 한가운데서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기 위한 열사들의 몸부림과
처절한 혼이 깃든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1907년 2차 만국 평화 회담에서 일본의 강제적으로 체결했던 을사늑약의 무효함을 알리고 우리의 주권을 되찾고자 고종황제가 파견했던, 전 대한제국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쌩테스부르그 한국공사관 서기관, 이위종, 세분의 열사가 기거했던 곳으로,
이준 열사가 순국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당시 De Jong이라는 호텔이 있었던곳으로, 1995년 재개발지가 되어 헐릴 위기에 놓이게 되자,
이곳 동포로 계신 이기항 선생님과 송창주 선생님[부부]께서 20만달러나 되는 사비를 들여
건물 매입을 하게 되고,
헤이그 시에 한국 역사 유적지로 보존해야된다는 청원을 내게 됩니다.
이에 헤이그시는 청원을 받아들여 재개발지에서 해제시켜줌으로써 이준 열사 기념관이 탄생하게 된것입니다.
이 두분의 노력이 없었다면 나라를 위해 이역만리에서 울분을 토하며 돌아가신 이준 열사가 머물렀던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것입니다.
이준 열사 순국 88년과 주국 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 8월 5일에 사단법인 이준 아카데미는
국가 보훈처와 한국일보, 전국경제인 연합의 후원을 받아 이준 열사 기념관을 개관했습니다.
이곳은 유럽에 있는 유일한 항일 독립운동유적지로, 설립 목적은 이준열사의 애국정신을 기를뿐만 아니라,
민족 후대와 더 나아가서 세계인들을 위한 정의와 평화,
사랑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장으로 삼고자 하는것이라고 합니다.
기념관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검사였던 이준 열사 흉상 뒷쪽에는 법, 정의. 평화라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승리감에 도취해 기념촬영을 한 일제 고위 관료들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만국평화회의에 세명의 열사를 파견한 고종황제..
문득,, 우리는 어찌 그리 힘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간 사진이 을사늑약 당시 보초 서는 일본 경찰
세열사가 네델란드, 헤이그로 가는 여정
1884년 모든 강대국들에 의해 독립이 보장, 승인된 대한제국은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할수 없었습니다.
이에 열사들은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라는 서명서를 1907년 6월30일자 평화회의보에 발표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했던 세가지는 첫째,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황제폐하의 승낙없이 행동을 취했다.
둘째,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황실에 대항하여 무장병력을 사용했다.
셋째, 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의 모든 법률과 관습을 무시한 채 행동했다.
세열사들은 비록 만국평화회담에 참석할수 없었지만, 기자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회의를 한번하면 몇달씩 걸렸다고 합니다. 본국과의 연락하고 다시 답을 받고 하다보면 시간이 많이 걸렸고, 중간에 회의보를 발간하기도 했다는데요, 기자들이 회의를 기록한 평화회보에 세분의 사진과 이위종 열사의 인터뷰 내용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기사 제목은 <축제의 해골>로 중요한 부분만 추려봅니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잔칫상에 해골을 놓아두는 관습이 있었다. 그 목적은 회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허무를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중략] 오늘 바로 이자리, 즉 리데르잘의 닫혀있는 문앞에
앉아 있는 대한제국의 이위종은 몸소 그옛날 이집트 해골의 현대판이 되고 있음을 스스로 절감하고 있다.
기자: [아는 이위종에게 질문했다] "여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왜 딱한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이모임의 평온을 깨뜨리십니까?
이위종 : "나는 흔히 제단이 헤이그에 있다고 말하는, 법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신을 혹시라도 이곳에서
만날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먼나라에서 왔습니다.
[중략]
이위종 : 여기 이대표들이 조약을 체결할수 있습니까?
기자 : 각국의 참여를 비준해야 하는 그들 군주들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경우에 그렇습니다.
이위종 : 아!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1905년 조약[을사늑약]이란 조약이 아니군요. 그것은 우리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대한제국 외무대신과 체결한 하나의 협약이 지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서명된 서류는 결코 비준된적이 없습니다.
[중략]
기자 :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이위종 : 그렇다면 이세상에 정의란 없는것이군요. 여기 헤이그에 조차도! 당신들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것이로군요. 결국 가증스럽게 당한 치욕을 회복할길은 없고, 정당한 조약이 불법적으로 위반된 사실에 대한 한 민족의 항의가 무시되어질수 있으며, 또 한나라의 독립은 그것의 국제적인 보장 여부와 관계없이 침탈당할수 있는것이라고.....
[중략]
정의를 갈망하며 회의장의 문 앞에 앉아 있는 이위종을 홀로 남겨두고 나는 멀어져 갔다.
분명 올라프[Olaf] 왕의 사가[saga]의 메아리를 들은듯했다.
"무력이 세계를 지배한다.
세계를 지배해왔다.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온유함은 연약한 것이다.
승리하는 것은 바로 무력이다."
기념관 전체가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안내를 해주시던 송창주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평화 회보에 실린
<축제의 해골>을 큰소리로 읽게 하셨습니다.
기념관을 방문한 아이들이 번역본을 읽고 있습니다.
<축제의 해골> 번역본입니다.
오른쪽 삽화는 평화의 상징인 예수가 초대받지 못해서 돌아가는것을 상징한것이었는데,
리더 마크라는 네델란드인 삽화가가 평화 회담에 참석하지 못한 이준 열사를 묘사한것이라고 합니다.
설명해주고 계신 송창주 선생님이십니다.
남편이신 이기항 선생님, 이 두분의 노력이 없었으면 이런 귀중한 역사의 장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것입니다.
1907년 제 2차 만국평화회담이 열린 비넨호프에 있는 리데르잘 회의장입니다.
2011년 7월의 모습입니다.
기념관에서 걸어 5-10분 거리에 있는 비넨호프안의 리데르잘 회의장인데요,
104년 전 세 열사가 저 문앞에서 눈물을 삼키고 발걸음을 돌려야했습니다.
나라 주권이 빼앗겨 할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찾아간 먼길에 뜻을 이루지 못한
그분들의 울분과 비애가 어떠했을지 한번 느껴보았습니다.
제2차 만국평화회담이 열렸던 1907년 6월의 헤이그도 제가 간 그날처럼 비가 간간히 뿌리는
쌀쌀한 날씨였을겁니다.
하늘은 그들의 비통한 마음만큼 어두웠겠지요.
비넨호프의 리데르잘 회의장 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평화로워 마치 104 년전 있었던 일은
모르는듯 무심하게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스치는 바람과 드리우고 있는 구름, 그리고 간혹 내리쬐는 해는
그옛날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온 세 열사의 간절함과 비통함을 알고 있을것 같습니다.
이준 열사가 묵었던 방이자, 돌아가신 장소입니다.
사진은 함경남도에 있는 이준 열사 생가입니다.
의문의 죽음
송창주 선생님께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 설명해주신 부분이 이준 열사의 사망에 관련된 것인데요.
결론은 불가사의로 남아있습니다.
이준 열사는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이 프랑스 혁명 기념일이라 파리에 가고 난 7월 14일에 돌아가셨답니다.
사진으로봐도 저렇게 건강해보이는 분이 어찌 그리 갑자기 돌아가실수 있는지 저 또한 의문스러웠습니다.
여러 설이 있는데요. 오른쪽 뺨에 종기가 나서 네델란드 의사가 수술을 하고 난뒤 사망했다는
병가설이 있고요. 일본을 거쳐 한국에서는 자살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의 유력지인 헤트·화데란트란 신문의 1907년 7월 15일자 기사를 보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행위에 항거하고자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한국대표 이상설, 이위종 두사람과 함께 온 차석대표 이준씨가 어제 저녁 서거하였다. 그는 이미 지난 수일 동안 병환 중에 있다가 바겐 슈트라트가에 있는 모 호텔에서 사망한 것이다."라고 전했답니다.
그런데 그의 사망을 제일 처음 알린사람은 네델란드인으로 사망원인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자살설을 보자면, 10월 18일까지 계속되는 회의인데, 초반에 안된다고 비관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는지?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파견된 강인한 특사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이준 열사였기에
자살설도 설득력이 없다는것입니다.
헤이그 묘지에 있었던 이준 열사의 비석, 이준 열사의 유해는 1963년 네델란드에서 수유리로 모셨다고 합니다.
송창주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북한 사람들은 이준 열사를 대단하게 기린다고 합니다.
신상옥 감독이 만든 "돌아오지 않는 열사"라는 131분짜리 영화가 있었는데요.
이 영화에서 이준 열사는 회의장 문을 박차고 들어가 연설을 하고는 그자리에서 자결한것으로 그려졌답니다.
1962년 이준 열사에게 건국훈장 추서
그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송창주 선생님께서는 일본의 식민지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 가속화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방이 독립운동의 발원지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의 NHK 방송에서도 이준 열사 기념관을 촬영하러 왔다고 하는데요,
그들은 일본의 잔학성을 인정하고 있더랍니다.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
송창주 선생님은 이 모든 비극이 나라가 힘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면서,
아이들에게 힘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까지 해주셨습니다.
한층 더 올라가 보니 복도에 백범이 이준 열사를 생각하며 쓴 휘호가 걸려져 있었습니다.
여러 대통령들의 휘호가 있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휘호~
이상설 열사의 방입니다.
옆에 이위종 열사의 방
당시 기자들은 이위종 열사를 왕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19대 후손입니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으로 당시 외국 대표들은 한국에 그런 세계인이 있었냐고 할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위종 열사가 아니면 이 모든 자료들을 구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방명록이 따로 있었지만, 이런 천에 다녀간 흔적을 남길수 있었습니다.
송창주 선생님은 워낙 열정적으로 안내해주시고, 설명해주셔서 무척 감사했답니다.
질문있냐고 하시길래 작은 아이가 기념관 들어오자 마자 저한테 물었던게,
세 사람인데 왜 유독 한사람만 기념하냐고 하길래
대신 질문을 드렸더니 세분 모두 훌륭한 활약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준 열사에게는 죽음이 있었고, 그의미가 뜻깊었기에 이준 열사 기념관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사적인 질문을 드려보았습니다.
연세는 일흔 둘로, 헤이그에 계신지 40년 되셨답니다.
40년전 남편분인, 이기항 선생님이 나라의 명을 받아 수출 일하기 위해 헤이그에 오셨답니다.
송창주 선생님께서 손수 만드신 우리 나라 지도앞에서 포즈를 취해주셨습니다.
아쉽게도 이기항 선생님 사진은 없습니다. 남편과 만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아 서두르느라고요~
이제서야 무척 후회가 되는군요.
귀한 일하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저 감사했습니다.
복도에는 작크 시락 프랑스 전대통령의 평화기원 서신과,
넬슨 만델라,
아웅산 수지 여사의 서신이 있었습니다.
이준 열사 기념관의 영어식 표기가 <Yi JUN PEACE MUSEUM, 이준 평화 박물관>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저 주어지는 평화는 없겠지요. 강권적으로 나라를 강탈한 일본이 있는 한 평화는 있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옛날 이 세분의 열사들은 평화를 찾기 위해 이곳에 파견되었다고 할수 있겠지요.
하지만 104년이 지난 지금도 평화는 이루어가고 있는 중인것 같습니다.
어쩌면 평화를 이루어가기 위한 과정들속에서 우리는 참평화를 누리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억지를 부려봅니다.
그나마 지금 누리고 있는 그것은 세 분의 열사 같은 선조들의 희생으로 자라난 잔인한 평화가 아니겠는지요.
1907년으로부터 3년뒤 대한제국은 36년간 일본의 치하에 놓이게 됩니다.
역사에 <만약은~>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만약에 세 열사가 평화회담에 참석했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함부로 판단할수 없는거겠지요.
하지만 당시 이른바, 평화회담은 열강의 세력 키우기 각축장이었다는것 하나만으로
짐작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세 열사의 정신은 본받고 싶습니다.
기념관을 방문하고 헤이그 시내로 들어서니 그 도시가 조금전과는 다르게 와닿습니다.
외국의 어떤 낯선 도시가 이렇게 친근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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