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한국 광부와 간호사들의 혼이 서려있는 독일 루르지방에서

파리아줌마 2011. 7. 25. 10:11

주말에 남편이 일을 보기 위해 독일의 뒤셀도르프를 간다고 하길래,

아이들 방학이라 무조건 따라나섰습니다, 전날 뒤셀도르프와, 호텔이

예약되어 있는 도르트문트를 검색해보니 별로 관광할만한곳이 없더군요.

 

예전에 수많은 광산이 있었던 서독 경제의 중심지였는데 지금은 모두

폐광되고,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도

한국과 결부시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큰아이는 독일이라면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이라며, 그런 명소를 방문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르트문트에는 그런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접고는 아이들과 함께 낯선 도시에 가보는것에만

의의를 두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도르트문트 근처에서 한인 행사가 있다고 저희와 동행하신 파리의

어떤 어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도르트문트가 그냥 한인과 상관없는 도시가

아님을 알수 있었습니다. 아주 깊은 연관이 있더군요.

 

그곳은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 즉 아버지, 삼촌 세대들이 

가난을 극복하고자 광부로 온 곳이었습니다.

 

함께 동행한 파리의 한인 어른, 이주덕 회장님이십니다. 파리에 오신지 40년이 넘었다고 하십니다.

1988년부터 90년까지 재불한인회장을 역임하시고, 파리의 한글 학교 건립및 유럽 한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해오셨습니다. 이회장님은 1969년 광부로 도르트문트에 오셨습니다. 육사 시험 면접에서 탈락하고 방황의 시간을 보내다가 높은 경쟁률을 뚫고 독일 광부 시험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3년 계약으로 온 광부일을 1년만에 그만두고 1970년 파리로 오셨답니다. 3년 계약 기간을 다채우는 사람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실 정도로 광부일은 힘들었다고 합니다. 독일인들의 체격에 맞게 구성된 독일 광산일은, 전쟁을 겪으며 잘 먹지도 못하고 자란 한국 젊은이들에게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한국의 광산처럼 산을 뚫어만든게 아니라 땅을 파서 지하 1천미터로 내려가서 지압과 지열에 짓눌리며 힘든 노동을 감당해야만 되었다고 합니다. 파리에서 도르트문트로 오는 여정에서 이회장님의 독일 광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남편과 저는 함께 웃고, 울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 방문시 광부촌을 찾았던 이야기를 하는데 이회장님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길래, 남편과 저도 따라 울었습니다. 몸서리치게 가난하던 60년대와 70년대 외화벌이로 나섰던 그들의 땀과 눈물은 오늘날 한국의 경제발전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도르트문트 시내

 

도르트문트의 광산은 문을 닫았고, 더 이상 이땅에 광부는 없지만 그옛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몸서리쳤던 한국젊은이들의 혼이 서려있는 도르트문트 시가지를 거닐어 보았습니다. 이회장님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별다른 관광지도 없는 이곳은 밋밋하면서, 묵직하고 음울한 분위기로만 다가왔을겁니다.

 

 

                                                                                                                                        도르트문트

 

1963년 12월 근처도시인, 뒤셜도르프에 처음으로 한국 광부 1진이 도착하고 48년이 흘렀습니다. 세월은 약이 되기도 하지만, 속절없이 야속하게 느껴질때도 있습니다. 잊혀져서 좋을 일이 있지만, 잊으면 안될일이 있을겁니다. 인간의 아둔함은 쉽게 잊고 지워버리는 인간을 탓하기보다는 그 모든게 시간이 흘러 잊혀졌다며 세월탓을 하려듭니다.

 

                                                                                                                                                                             도르트문트

 

금요일 저녁 맥주 파티를 벌이고 있는 도르트문트에서 그옛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땀과 눈물을 묻었다는 흔적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세계경제 12위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48년전 그렇게 젊은이들을 보내야만했다는것을 잊지는 말아야겠지요. 그들이 1천미터 땅밑에서 캐낸것은 석탄이라기 보다는 희망이었습니다. 

 

 

도르트문트에 있는 광산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1966년에 폐광이 되었다고 하니 한국인들도 일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높이 솟아 있는 저 철물만 빼면 이곳은 수도원 같았습니다.

 

검게 그을린 독일 광부들의 모습에서 삶의 치열함과 처절함이 느껴졌습니다.

 

 

도르트문트에서 30분 가량차로 가면 에센,Essen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도르트문트,뒤셀도르프, 에센, 오버하우젠, 아헨등 한국 광부들이 있었던 도시들이라는데요,

루르 지방이라고 한답니다.

에센에 있는 광부기념회관에서 세계 한인 교류 협력기구[W-KICA] 유럽 지부 창립총회가 열렸습니다.

저희들은 초대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떨결에 가보게 되었습니다. 

 

이 기념관은 파독 광부들의 연금으로 마련된것이라고 합니다.

독일정부가 독일에서 일했던 한국 광부들의 연금을 한국의 노동부에 보냈다고 합니다.

이에 파독 광부들이 뭉쳐 기념관 마련을 위해 쓰여졌다고 합니다.

 

 

한국경제 발전의 주춧돌이 된 파독 광부와 간호사

 

회관 안에 들어가자 한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현수막이 눈에 들어옵니다.

1963년 12월 독일땅을 밟기 위해 젯트기에 오르고 있는 광부들입니다.

 

전후복귀 사업으로 광산업에 심혈을 기울이던 독일은 비인기 직종이었던 광부들의 노동력이 모자라

한국정부에 요청하게 되고, 독일에 갈 광부를 모집하게 됩니다. 500명 뽑는데 모인 지원자들은 무려 4만 6천명이었답니다. 이들중 상당수가 대학졸업자들과 중퇴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합격 리스트는 고시처럼 신문에 보도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간호사들은 1965년부터 왔다고 합니다.

광부들은 고된 일때문에 잔꾀를 부리기도 했다는데 간호사들은 1년 정도 언어를 익히고 나서는

야무진 한국여성의 면모를 보여 독일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합니다.

노인환자들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주사를 안아프게 놓는 것으로 알려져 인기가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그녀들의 근면 성실함은 이웃 나라들에게도 알려져 계약기간이 끝나고 다른 유럽나라로 옮겨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의과 공부를 계속해 의사가 된분들도 있고요.  

 

행사장에서 남편은 저에게 조심스레 커다란 책을 한권을 건네며 가방에 넣으라고 합니다.

2009년에 발행된 <파독광부 45년사, 1963-2008>라는 크고 두터운 책이었습니다. 발행인은 <재독 한인 글뤽 아우프회>라고 되어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원하는데 수량은 한정되어 있어 다른이들 모르게 건넨것이라고 합니다. 귀한 것을 받아온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호텔로 돌아가 새벽까지 책을 읽었습니다.

여러 자료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광부들의 생생한 체험담은 늦은 시각까지 책을 놓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고로 죽은 이들, 기계에 장갑이 말려들어가 손가락이 잘린 이들, 그런 날은 땅밑 작업장은

더욱 진한 우울로 덮여있었다고 합니다.

 

책에 나온 자료를 바탕으로 글을 씁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수입은 1970년대 한국경제성장의 종잣돈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파독 계약조건은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달 봉급의 일정액을 반드시 송금해야된다"는

조건이었답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에 건너간 광부는 모두 7,932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독일의 탄광에서 일하고 연금과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의 70-80%를 고스란히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습니다.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천만 달러로 한때 한국 GNP의 2%에 이르렀습니다.

 

                                                              W-KICA 유럽 창립총회에 모인 재유럽 한인들, 이분들은 거의 파독 광부, 간호사들이십니다.

 

박정희 대통령 독일 광부촌 방문

 

독일로 광부를 파견하고난지 1년뒤인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을 방문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차관을 거부당한 박대통령은 우리 광부들이 가있는 독일에 희망을 걸게 되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서독에 파견한 광부와 간호사들이 우리나라 개발연대를 이끌어온 정신적 씨앗이었어요, 헌신적으로 일하는 이들에게 서독 국민은 박수를 보냈지, 서독 국회의원들은 대정부 질의에서 한국에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했고, 이것이 박대통령을 초청한 계기가 돼었죠. 그래서 2차 상업차관 2억 마르크를 받을수 있었습니다."

                                                                   -한국산업 개발 위원장, 백영훈 박사의 회고에서-

 

그리고 박대통령은 뒤스부르크에 있는 광부촌을 방문하게 됩니다. 책에 있는 글 그대로 옮깁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라섰다. 그순간 함보른 탄광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차츰 커지던 애국가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한 강산,,, 대목부터 목이 메인 소리로 변해갔고,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가사를 대신해버렸다.

 

대통령 내외와 300여명의 우리 광부와 그리고 50여명의 우리 간호사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였다.

밴드들의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나갔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구절 나아가지 못했다. 이구석 저구석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갔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연설 원고를 옆으로 밀쳐버렸다.

 

"광원 여러분, 간호사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많이 괴로울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하여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결국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대통령 본인도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광부들에게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로 나눠주고 광부들의 개인기숙사를 일일이 방문하고 격려하며, 돌아갈 차에 올랐다. 1964년 12월 10일 서독 루르 탄광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서독의 차관은 광부들의 임금을 담보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모든것을 떠나 서독에 우리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나가있지 않았으면 차관은 불가능했겠지요.

당시 그들의 영향력을 무시할수는 없을것입니다.

 

그랬던 박정희 대통령은 해외에 반정부 인사가 많다는 이유로 참정권을 박탈했고,

70년대 파리의 국제 기숙사에 한국관을 지을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버렸으며,

광부들에게 한국에 돌아오면 잘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입바른 거짓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담보되다시피해서 독일정부에게 돈을 빌려가며 광부들과 함께 지었던 대통령의 눈물은

그의 서슬퍼런 독재와는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음을 알수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깊은 관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0여년전 시부모님과 함께 유럽 여행을 하던 와중에 독일의 어떤 한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호텔 주인은 간호사로 오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연세 많으신 시아버님에게 호소하듯 하신 말씀이 가끔씩 꿈인듯 현실인듯

잊혀지지 않고 떠오르곤 합니다.

 

70년도 지질이도 못살았던때, 매일 연탄 가스 중독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때, 그가난이 징글징글해서

독일로 왔다고 합니다.

어렵게 고생해서 번돈을 고국으로 부치곤 했는데, 요즘 흥청망청한 한국의 삶을 보면 정말 속상하다고 합니다.

 

30대초반의 철없던 저는 고개 끄덕이며 듣고 있던 시아버님옆에서 갸우뚱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속상한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는 알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분처럼 힘들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살려고 발버둥친 사람이 가져온 간절함이 가벼운 그무엇에 부딪혔을때 가질수 있는 속상한 마음이라는것을요 

 

                                                                                                            1963년 12월 247명의 한국광부 1진이 도착한 뒤셀도르프

 

W-KICA[세계 한인교류 협력기구] 행사장에서 본 어떤 파독 광부는 한국이 <발톱의 때>만큼도 그들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했고, <정치인들은 해외동포를 홍보에 우려먹을 생각밖에 없다>며

다소 격앙된 어조로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또한 어떤분은 언론에서 떠들기만 했지 어떠한 실질적인 혜택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제 45년을 도르트문트에 사셨다는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간호학교 2학년때인 20살에 간호사로 오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독일행은 당신의 선택이었고, 그간 한국에 세금을 낸것도 아닌데 우대해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더 먼옛날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에서 힘겹게 일한 동포도 있었고, 뜨거운 중동지역에서 고생한 이들, 그리고 IMF로 한국안에서 어려운 삶을 산 이들도 있는데, 본인들만 유별나게 그러는게 싫다고 하십니다. 독일이라는 선진국에서 혜택받고 잘살았다며 말씀하시더라고요.

 

                                                                                                                                               뒤셀도르프에서 바라본 라인강

 

오늘 아침 뒤셀도르프 한인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로 오신 어른들과 음악 공부하러온 유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처음 왔다고 어떤 분이 당신의 시집을 싸인해서 주십니다.

71년에 간호사로 오신 분인데, 2007년 첫시집을 내고 두번째 시집이라고 합니다.

 

너무 귀한것을 그냥 받아 몸둘바를 몰라하며 첫페이지를 읽는데

어떤 귀절이 와닿습니다.

",,,생존이라는 현실의 장벽에 부딪쳐 취업으로 독일에 온후, 고달픈 나그네 삶에 깜빡 한 숨 토끼잠을 잔다는게 

그만, 너무나 오랜 잠을 자버렸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그분의 시 한편을 인용합니다.

 

-흑인이 아닌 그 흑인들의 염원이-

 

                                                                                         이금숙

지금 나는 지하 1200m에서

40여 년 전 재독한인교민 역사의 기초를 다진

주춧돌 한 면을 더듬어봅니다

 

먼 옛 시절 고국 떠나온 젊은이들이

용솟음치는 청청한 꿈을 3년 동안이나

새카만 탄가루에 땀방울로 버무리던

막장을 들여다보며

숙연해짐으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그들이 남긴 발자국 속엔

피땀으로 얼룩진 고통의 신음이

아직도 굉음으로 귀를 때리고

사랑하는 처자식, 부모형제를 그리던 아픔의 눈물은

아직도 바닥에 질퍽거립니다

 

세월은 흐르고

독일의 탄광은 모두 사라져

과거사의 한 토막으로 남을 터인테

 

하지만

우리의 조국이여, 젊은이들이여

그리고 앞날에 남은 짧은 생애를 밝게 살아

남기고 갈 이름을 갈고 닦아 광을 내야 할

우리 재독한인교포들이여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가난으로 척박하던 우리의 조국

세계로 지향하는 위상의 밑거름이

지옥 아닌 이 지옥에서 형성되었고

부모님들의 평안, 형제들의 성공을 비는

흑인 아닌 그 흑인들의 염원이

오늘의 발견을 이루어낸 길잡이가 되었음을

아울러

그들이 이 지하 깊은 곳에 남긴 고통과 눈물 위에

현 실존의 재독한인교민사회의 주춧돌이 놓였음을

[2007년 9월 Deutsche Steinkohle Ber gwerk Lippe 광산을 방문하며]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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