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한국아줌마

여성들에게 힘을 주고 떠난 이브 생 로랑

파리아줌마 2008. 6. 5. 01:10

                                                     

                                                 1954년의 이브 생 로랑,, 17세에 디자인 콩쿠르에 1위로 입상한때..

 

6월의 첫번째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아이들 학교 가는데 옷을 어떻게 입혀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모호한 날씨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일기 예보를

보기 위해 프랑스 통신사 사이트에 들어갔다.

일면에 "이브 생 로랑이 어쩌구 저쩌구,,," 무엇에 가려서인지 옆에 글이 보이지 않는다.

이브 생 로랑이 어쨌다고? 하며 다시 보니, "별세라고.."

 

나에게 YSL은 옷보다는 화장품으로 보다 더 가깝게 인식되어있다.

특히 20대에 YSL의 향수, "paris"는 상큼한 향이 좋아 자주 즐겨 뿌리곤 했었다.

 

                                                       

                                                       Christian Dior의 조수로 일하고 있었던 YSL은 1957년 Dior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Dior Maison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다.

 

월요일 아침 YSL의 별세 소식을 접한 프랑스는 동요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프랑스 통신사 소식에서는 사망 원인에 대한 어떠한 언급이 없었고,

웬지 쉬쉬~~ 하는 분위기 마저 느껴져 이 아줌마의 호기심을 잠시 자극하기는 했으나,

오랜간만에 "라디오 클래식"에 채널을 맞추고 청소를 하고 있으니 아침 10시 뉴스에

뇌종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Dior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1958년 2월 Dior마크를 달고

                                                      YSL의 첫작품이 패션쇼에서 선보였다. 이 원피스, Trapeze는

                                                      그당시 가는 실루엣을 강조한 원피스 디자인과는

                                                            단절된 것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브 생 로랑은 60년대에 남성 양복 정장을 여성복으로 도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의 반세기 동안 패션 디자이너의 행로에 함께 했던 YSL재단의 피에르 베르제씨는

"샤넬은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이브 생로랑은 힘을 주었다.

그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미의 세계를 떠났으며, 선동가였고, 창시자였다.

그 의미로 또한 절대 자유주의자이고 무정부주의자였다.

사회의 한가운데 폭탄을 던지면서,,, 그렇게 그는 여성들을 변화시켰다."고 했다.

 

                                                     

                                                       1963년의 YSL

 

 

YSL의 사망 소식을 접한 사르코지 대통령은 공식 서명을 통해,

" 오뜨 꾸뛰르를 예술의 경지로 이끌어낸 첫 인물"이라고

칭송하며 애도했고, 예전의 패션 모델이었던

영부인  카를라 부루니는 "진정한 예술가였고, 평범하지 않은 한 인간"이었다고

YSL을 회상했다.

피용 국무 총리는 "오뜨 꾸띄르의 역사에 길이남을 예외적인 창시자"였고,

"프랑스를 빛낸 천재적인 예술가"라고 했다.

 

                                                    

                                                     2001년, YSL의 작품쇼에서의 카를라 부루니

 

피에르 베르제씨에 의하면,

2002년 마지막 패션쇼를 끝으로 활동을 중단한

YSL은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잘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가끔씩 기사에게 차를 몰게 해 그의 부틱을 가곤 했었는데, 그 짧은 행로속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느꼈다고 한다.

 

2002년 은퇴 패션쇼에서 그는 "나는 모드를 통해 ego[자아]를  충족하는 환상적인

분위기와는 다르게 자라났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여성들의 원함을 충족시켜주는데 뛰어들었다.

지난 세기에 있었던 여성 자유 운동에 함께 하고 싶었다."고 했다.

 

YSL은 68년 5월 혁명 세대이다.

그시대에 30대였던 그는 모드를 통해 여성들을 자유케하고 해방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혁명 40주년을 기리는 행사들이 프랑스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68년, 5월의 여성들 옷차림새가 패션 사이트에 등장하기도 하는 요즘이다.

 

혁명에서 YSL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40주년을 기리는 5월 한달이 지나고

6월의 첫째 날에 그가 별세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만 같다.  

 

                                            

                                             2002년 파리에서 있었던 YSL의 은퇴 패션쇼에서

 

 

한 인간의 71년의 생애와 그 마감은 많은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

그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는 문득 슬픔에 빠져있을 유족들이 생각이 나면서

어떤 부인과 몇명의 자녀를 두었을까 하는 소박한 궁금증이 일어난다.

 

YSL은 병적으로 소극적인 성격이었고,

"두려움과 끔찍한 고독"속에서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오뜨 꾸뛰르계의 한획을 그은 화려한 삶을 살다간 YSL이지만

우울증과 싸우며 요양원을 전전했다는 소식은 그 화려함뒤에 오는 허무함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나약한 한 인간의 면모를 보여주는듯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간"인 모습을 보기 보다는 업적을 보며 그를 회상하게 될 것이다.

  

화요일 프랑스 통신사 사이트에서 YSL의 별세와 장례식 소식은

프랑스 네티즌들의 조회수 2위를 차지 하고 있었고, 710개의 리플이 달려있었다.

리플의 내용을 보면, "Adieu Monsieur[아듀 머슈우], 혹 당신은 이제 천사들이 입을 옷을 만들겠네요."

라는 재치있는 리플도 있었고,,, "Bon Voyage, [좋은 여행하세요]"라며 고인에게 인사하는 네티즌도 있었다.

 

YSL의 장례식은 목요일 파리에 있는 Saint-Roche 교회에서 사르코지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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