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한국아줌마

10년전 프랑스 언론, 교민들을 달팽이속의 한국인이라고?

파리아줌마 2010. 8. 9. 08:05

10년전쯤 프랑스 우파 일간지인 르피가로지는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교민들을 일컬어 <달팽이속의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기재한 것을 당시 교민지가 번역해서 싣었던걸 읽은적이 있다.

 

어떤 칼럼니스트가 쓴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생활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대충 기억나는 것은 한국인들은 파리 중심지인 15구에

주로 모여살고 있고, 프랑스에 있으면서도 불어를 익히려하지 않고

모국어만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더군다나 프랑스 문화를 

접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달팽이속에 들어가 있는 한국인이라는 것이었다.

 

우파 일간지답게 외국인을 보는 시선이 날카롭기만 했고,

프랑스인답게 비난이 아닌 교묘하게 조롱한 내용이었다.

당시 그내용을 읽어내려가며 나는 움찔~했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평상시 내가 생각하던 것이었기에 묘한 시원함마저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는 지난 10년 내내 <달팽이속의 한국인>이 한번씩 떠오르면

마치 악몽을 꾸고는 잊지 못하는것처럼 나를 괴롭히곤 했었다.

 

남의 나라땅에 사는 것에 대한 위축감과 더불어 같은 한국인들을

비꼬아 놓았던 칼럼을 읽고 가졌던 후련함에 대한 가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10년전이면 나는 유학생에서 교민으로 자리바꿈하고 있을시기였다.

파리8 대학에서 불문학을 공부하며 이곳 문화를 접하던 유학생에서 학업을 포기하고

남편을 도와 한국사람들을 주고객으로 겨냥한 사업을 시작하던 때였다.

 

부모 잘만나 편하게 유학생활하면서 되지도 않게 콧대만 높아서 불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교민들을 알게 모르게 무시했던 오만함은 지난 10년동안 퍽퍽한 교민의 삶을

살아오면서 온전히 내려놓을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차츰 나를 괴롭혔던 <달팽이속의 한국인>이 정리 되어갔다.

 

이른바, 달팽이속의 한국인들은 100불만 손에 들고 파리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와서는 온갖 고생마다않고 열심히 살아온 분들이었고,

쌩떼같은 자식들 한국친척집에 맡겨두고 이앙다물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이곳으로 온 분들이었다.

 

파리외곽 지역에 방한칸에서 자식들과 함께 지내며 전철로도 한참을 가야될 먼일터로

교통비 한푼 아끼고자 걸어다니며 삶을 일구어온 분들이었다.

 

그분들에게 파리는 그저 고단하고, 척박한 삶의 터전일뿐이었으리라.

어찌 불어를 익히고, 프랑스 문화를 접하며, 파리의 낭만을 느낄 여유가 있었을까?

 

 또한 60, 70년대 독일에 광부로, 간호사로 갔던 분들이 파리로 와서 정착한 경우도 많았다.

예전 시부모님과 함께 유럽여행을 하면서 독일에서 우연히 찾아갔던 곳이 한국호텔이었다.

호텔주인은 한국여자분으로, 그옛날 너무나도 가난했던 한국, 연탄가스중독으로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때에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독일에 간호사로 오신 분이었다.

 

그분은 연세 많은 시부모님 앞이라 그랬는지, "요즘 한국의 흥청망청한 삶을 보면 너무 속상하다"며

한탄했다.

 

1960년대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이 한국으로 송금하는 액수는 연간 3천 5백만불로,

당시 총수출액의 30%를 차지했다고 한다. 오늘의 부유한 한국에는 그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

 

그런 분들로 이루어진 오늘날 파리 한인사회다.

이제 그분들은 파리에서 단독 한글학교를 세우는데에 큰 역할을 하고 있고, 

프랑스와 파리에서 한식과 한국 문화를 알리기도 하며,

또한 어떤 한인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응원을 아끼지 않는 분들이다.

 

치기어린 지난 날에 가졌던 교만을 고해성사하듯 한번쯤은 이야기하고 싶었다.

 

프랑스 우파 일간지 논설자의 눈에는 <달팽이속의 한국인>일런지 모르겠지만

이제 나에겐 파리의 힘들고 고단한 삶을 잘살아내신 존경스런 한인어른들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