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한국아줌마

프랑스 시내버스에서 느껴지는 경로사상

파리아줌마 2010. 9. 9. 07:27

노인우대 받기를 거부하는 프랑스 시니어들

 

중학교 2학년쯤이었을겁니다.

학교 친구들과 시내버스를 타고 어디로 가고 있었습니다.

주위를 돌아볼틈도 없이 정신없이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학생, 내가 꼭 이야기를 해야돼?" 하고는

조금은 언짢은 목소리로 버스에 앉아있는

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무슨일인가 싶었는데 자리를 비켜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놀라서 화들짝 일어나 할머니에게 자리를 내어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어찌나 무안하던지요.

당시 저는 큰 잘못을 저지른 학생이었습니다.

 

호령하는 부잣집 마나님 같은 그 할머니의 말투에 억눌리고, 

모범생 컴플렉스를 가진 여중생이었던지라 반듯하게 굴지 못했다는 자책감까지

합세해 한동안 그일을 떠올리면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할머니는 저에게 핀잔까지 섞인 강요를 했습니다.

만약 부탁을 했더라면 40이 넘은 지금 기억나지 않겠지요.

 

시내버스를 자주 이용했던 학창시절에는 연세있으신 분이 주위에 있으면

아무말없이 발딱 일어서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습니다.

학교에서도 이를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른을 섬기는 태도를 심어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방에게 강요되어질때는 더이상 미덕일수는 없겠지요.

 

 프랑스 노인들에게 무조건 자리양보하지 마라

 

저의 프랑스 정착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선배언니는 대중교통이용시 무조건 노인들에게

자리양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버스타서는 어떻게 하는지 눈여겨 보게 되었습니다.

 

노인이 버스에 오르면 앉아 있던 젊은이는 "앉으시겠어요?"하고 물어보더군요.

어떤 분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앉고, 어떤 분은 괜찮다며 서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주 유연해 보이고 좋았습니다.

노인이라고 무조건 앉아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파리 지하철에는 노약자석이 따로 없었는데, 올3월부터 1호선에만 생겼다고 합니다.

좌석 이름은 노약자석이 아니고 <우선석>입니다. 우선적으로 양보해야되는 자리입니다.

버스에도 좌석 구분이 없다가 1,2년전부터 <우선석>이 생겼습니다.

버스 앞부분 6좌석 정도인데요, 9가지에 해당되는 이들을 위한 우선석입니다.

 

그 9가지에는 주로 장애인, 임산부, 4살미만의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이고요, 75세이상인 노인들이 해당됩니다.

 

프랑스인들에게 우선석이라고 하면 노인보다는 임산부를 먼저 떠올립니다.

노인은 그다음 순위더라고요. 

그렇다고 프랑스 사회가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큰아이 초등학교때 교장이 강조한 것이 어른에 대한 존중심없는 행동을 하는 아이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프랑스 노인들은 젊은이들에게 대우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서양의 나라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작년 한국에 갔을때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노약자석에 자리가 비어있는데도

어느 누구도 앉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의아했습니다. 노인들도 없고 자리가 비어있으면 앉으면 되는것 아닙니까?

그래서 작은 아이와 노약자석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정거장에서 신문을 접어든 초로의 아저씨가 타시더니

노약자석에 있는 저희들을 보는 눈빛이 너무 위협적이어서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지하철 노약자석의 위력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노인들이 나서서 젊은이들에게 섬김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버릇없이 구는 젊은이들이 많아져서 당신들 스스로 권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럼으로써 공경심이 더해지면 괜찮을텐데 그렇게 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잘알것입니다. 

 

경로사상이 이상한 무기로 쓰여지는 것 같아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원래의 좋은 의미가 퇴색되어지는듯해서 씁쓸하기도 했고요.

 

오늘 오후 큰아이 학용품 준비로 버스를 타고 쇼핑센타에 갔습니다.

버스에 앉아가는데 머리색깔 하얗고 얼굴에 주름이 많은 할머니가 타시더라고요.

그래서 <앉으시겠어요?>하니 두정거장뒤에 내린다며, <괜찮다>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할머니는 두정거장이 아니고 한참뒤에 저랑같은 정거장에서 내리시더군요.

이것이 프랑스 시내버스안에서 느껴지는 프랑스식 경로사상이었습니다.

무조건 양보해서도 안돼고, 또한 양보를 그냥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사소한 것에도 물어보고 서로 대화하는 시내버스안의 젊은이와 노인의 모습입니다.

물론 지팡이를 짚고 힘들게 버스에 오르는 분이 있다면 바로 일어나 부축해서 자리에 앉혀드려야겠지요.

그리고 앉아 가고 싶은 노인들은 우선석에 있는 사람에게 "자리 내놓아라"는 식이 아닌 정중하게 부탁을 합니다.

 

노인을 공경하는 태도가 노인들에 의해 강요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