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한국아줌마

소박하고 검소했던 프랑스 교수들

파리아줌마 2010. 9. 18. 08:10

베아트리스 디디에 교수님을 추억하며

 

작년쯤인가 봅니다.

둘째 아이도 어느정도 자라 여유가 좀 있어지니

<내가 프랑스에 왜 왔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공부에 대한 생각이

비로소 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공부하기 싫어 그만두었습니다.

이제는 삶의 회한이 밀려올때인가 봅니다.

그러고 나니 예전 지도교수님이었던 베아트리스 디디에 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해졌습니다.

 

잘 계시는지? 여전히 연구에 몰두하고 계신지?

연세가 꽤 있었는데 그간 돌아가신 것은 아닌지, 등등,,

이제는 안부를 물어볼만한 유학생도 주위에 없습니다.

 

저는 공산주의자가 총장으로 있는 파리8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래서인지 8대학은 외국인들의 입학을 어렵잖게 허락해주었습니다.

8대학은 영화와 조형예술쪽으로 유명합니다.

 

이곳 대학들은 모두 공립이라 교수들이 공무원입니다.

공무원 월급이라 그리 많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월급의 많고 작음을 떠나 8대학을 다니며 만난 교수님들의 모습은

한국에서부터 고정적으로 박혀있던 교수님들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들의 겉으로 보이는 차림새에 놀라고, 함께 이야기하다보면 교수의 권위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소박함에

놀라곤 했습니다. 아마 제가 고정관념을 한번씩 깨는 순간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본 그들은 정말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당연한 것들이 때로는 특별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요.

 

처음에 초현실주의쪽으로 하려고 끌로드 무샤르 선생님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교수님과 첫만남을 가진뒤 베아트리스 디디에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는

여성 작가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교수를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뮤샤르 선생님에게 전화로만 이를 알리니,

<당신이 그쪽으로 관심이 있으면 당연히 그분과 함께 공부해야지요>

라고 쿨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지금생각하니 나 급한 것만 생각하느라 참 예의없이 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를 전화로 알리는것은 좀 아니지요.

그때는 철없는 젊은시절이었다고 변명을 늘어 놓을수 밖에 없습니다.

 

무샤르 선생님이라면 떠오르는 것이 검은 우단인지, 비로도인지 그런 재질의 양복입니다.

제 눈에는 한번도 갈아입고 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항상 깔끔하고 단아했습니다.

날씨가 더운 날은 윗저고리만 벗고 와이셔츠 소매 걷고 있습니다.

공부않고 그런것만 관찰했나고 할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랬습니다.

 

항상 경이로웠던 디디에 선생님

  

그래서 베아트리스 디디에 선생님에게로 왔습니다.

 

디디에 선생님은 프랑스 18세기, 19세기의 문학을 장악하고 있는 대가였습니다.

그리고 1993년에는 파리의 고등교육기관[Ecole Normale Superieur]에 교수로 임명되어

8대학 교수와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문학과 음악을 연결하는 연구로도 유명하고요.

프랑스 대학출판사에서 10여권의 저술이 있고, 연구진들 지도로도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명성과 실력에 비해 심할 정도의 소박함과 검소함에 자주자주 놀랐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면 연구실을 향해 가는 선생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거의, 항상 치마 중간에 있는 트임위 2, 3센티가 더 틑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관찰에 좀 들어갔습니다.

틑어진 치마를 입고 오는 날이 멀쩡한 치마를 입고 오는 날보다 많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손에는 비닐봉지들이 주렁주렁 들려있습니다.

프린트가 헤어진 낡은 쇼핑백이었는데, 과연 그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싶었는데요,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연구한 귀한 자료들이 그비닐봉지안에서 나왔습니다.

 

학생들에게 나누어줄 자료부터 본인 논문 정리한것, 학생들 과제물까지,

비닐이 찢어지지 않는한 들고 다닌다는 것처럼요. 당시 자주자주 놀랐습니다.

마치 연구하다 학교갈 시간되면 손에 잡히는 치마입고,

주위에 굴러다니는 쇼핑백에 주섬주섬 자료들 챙겨오는 것 같았습니다.

 

치마에 바늘을 가져다 대는것도 가죽가방을 사러가는 것도 선생님에게는

공부할 시간을 빼앗기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드문 금발머리를 클래식하게 말아올려 유자핀으로 고정하고 다녔습니다.

어떨때는 유자핀 몇개가 선생님 머리카락에서 뛰쳐나오려고도 했습니다.

그저 마음으로만 치마도 가방도 머리도 어떻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얼굴은 천사같습니다. 수업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어주십니다.

재미있는 테마가 나오면 시골아줌마 같은 선생님의 목소리는 더욱더 높아집니다.

친근하게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그런 선생님이 참 좋았습니다.

 

선생님은 한국학생들을 많이 받아들여 지도했습니다.

석사 논문발표때는 <불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이 이렇게 논문을 쓴것은 훌륭하다>며

점수를 후하게 주셨습니다.

 

한국학생들 사이의 소문에 의하면, 선생님의 아들은 엄마가 너무 공부하는 것만 봐서

공부라면 진저리를 친다고 합니다.

 

어떤 한국 남학생은 선생님 손자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주기도 해서 선생님이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한국학생들을 지도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정말 책읽는게 좋고, 공부하는것이 좋아서 교수가 된 사람 같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천직이라고 하겠지요?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할수 있는게 바로 천직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