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외규장각 찾은 박병선 박사 인터뷰

파리아줌마 2011. 3. 29. 07:53

얼마전 직지 대모이자 외규장각을 연구한 박병선 박사님을

터뷰한 것을 포스팅했습니다. 오늘은 그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관련글 : 외규장각 발견한 박병선 박사의 못다한 이야기

 

몸이 허약하신 관계로 한꺼번에 말씀을 다못하시고 한참뒤에

남편이 대사관으로 찾아가 인터뷰한것입니다.

 

파리독립기념관 건립 보는게 박사님의 마지막 소원

 

1919년 제 1차 세계 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파리에서는

역사적인 강화회의가 열렸습니다.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 천명 이후 열린 첫 국제회의로 식민치하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는

큰 기대를 걸게 해준 회의였지요. 이에 김규식 선생을 비롯한 우리 대표단은

파리 9구, 샤또덩 38번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차리고 조국의 독립 승인을 위한

외교 활동에 심혈을 쏟았습니다.

 

이장소를 찾은분이 박병선 박사님이십니다.이곳을 발견한 박사님은 주불대사관과 함께 현판을 달기 위해 애써왔는데 건물주의 반대로 진전을 이루지 못하다 파리9구 구청과 외교부들에 수차례 건의한 끝에 승인을 받아 현판을 걸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2006년으로 한불 수교 12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날 박사님은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참석하셔서 "소원했던 것이 50년 만에 이루어져서 너무 기쁘다"고 하셨습니다. 박사님의 마지막 소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샤또덩 38번지에 독립기념관을 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외규장각에 얽힌 이야기들과 박사님의 마지막 소원 한번 들어보시지요.

 

 

박사님, 현재 건강은 어떠신가요.


지금 병은 없어요. 의학적으로 말해서는 이제 괜찮은데, 이렇게 기력이 없네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래요. 그리고 다리 힘이 없어서 일어서고 걷기가 너무 힘들어요. 외규장각 도서가 영구대여라는 조건으로 돌아오는데.
처음에 이 도서를 어떻게 하면 한국에 가져갈 수 있을지 그 문제를 바로 서둘렀으면 좋았을텐데. 그때는 너무 무심했다고요. 정말 너무 무심했어요. 처음에 책을 찾았을 때,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책이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다고만 잠깐 얘기가 되다가 그 다음에 쏙 들어가 버린거예요. 더 이상 생각들도 않고. 그리고 거의 10년이 지난 후에 그때서야 규장각 도움으로 제 책이 발행되고, 서울대 총장님하고 이태진 교수님께서 상의하셔서 반환운동을 시작하시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죠.

외규장각 도서가 반환되기까지 혼자서 겪어내야 했던 그 시간들을 되돌아보실 때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그 긴 세월 동안 있었던 역사라고 할까요? 저한테는 역사예요. 그런데 추억이라도 심한 추억이죠. 처음에 한국에서 조금만 더 신경을 써주었다면, 또 당시 정세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 때 정부에서 조금 더 이쪽으로 힘을 실어주었다면 일은 참 순조롭게 해결되었을 텐데. 그러면 지금의 '대여' 라는 말도, 소유권이 불란서에 있지도 않을텐데.,,제 생각에 그렇게 힘들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파지로 분류된 책 가져가는데 뭐가 그렇게 힘들었겠어요. 결국 그거예요.

외규장각 도서를 찾고 나서 도서관 측과의 갈등으로 결국 도서관을 떠나게까지 되셨다면서요.

그 때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그 당시 도서관하고 한국 정부, 대사관 사이에 있었던 미묘한것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죠. 참 복잡해요. 내가 시간적으로 정리를 한 번 해봤는데, 그래도 참 복잡해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 저렇게 사건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무엇을 어디에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주 미묘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초기에 외규장각 도서를 찾았을 때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제목을 종류별로 모두 정리해서 기자들에게 보고를 해줬어요. 그랬더니 기자들이 거기에다가 제멋대로 '발견'이라는 말을 썼다고요. 당시 도서관에서 한국에서 나온 신문을 일일이 최악으로 번역을 해가지고, 물론 가짜로 꾸밀 순 없지만, 똑같은 말마디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잖아요, 그래서 도서관에서는 규장각 도서가 있는 것을 네가 <찾은 거지>, 어떻게 그것이 네가 <발견한 것>이냐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고요. 그래서 기자 분들께 사실 찾은거지 발견이 아니다, 발견 소리 좀 쓰지 말아달라고 하니까, 한국에서는 그 말 밖에 다른 말이 없다고,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냐고 말하는 거예요. '찾음'이라고 쓰면 맥이 없는 것 같고, '발견'이란 단어도 한국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으니까 해석하기에 달렸는데 말이죠.

 

결국 제가 발견이라고 해서 마치 최초로 찾아낸 것처럼 얘기를 했다고 그것을 가지고 도서관에서는 저를 달달 볶았어요. 외규장각 도서에 관한 언급은 제일 먼저 모리스 쿠랑이 했어요. 당시 모리스 쿠랑도 책 제목과 왕립도서관(Bibliothèque Royale)에 있다고만 썼지, 책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못하고, 제목과 크기에 대한 정도만 이야기를 했다고요. 도서관은 모리스 쿠랑이 이미 발표한 것을 네가 다시 발표한 것이지, 왜 네가 발견한 것이냐고 문제를 삼았어요. 그래서 나는 다른 것 발표한 것 없다, 이 책이 어디에 있고, 그 제목이 무엇인지 알렸을뿐이지 더 구체적으로 말한것도 없다고 말했죠.

직접적으로 도서관과 갈등을 일으킨 계기가 있나요.


도서들이 오래되다 보니 몇 권만 표지가 제대로 남아있었지, 대부분은 모두 상해서 수선을 하게 되었어요. 의궤 표지들이 두꺼운 종이에다가 비단으로 싸여져 있어요. 그런데 아직도 어디서 누가 한 일인지 모르지만, 수선을 맡긴 사이에 누가 의궤에 있는 그림을 면도칼로 잘라갔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조금 똑똑했으면, 제본을 한 것이기 때문에 장을 모두 빼갔으면 잘라버린 지도 모르고 지나갔을 텐데, 그 옆에 도막을 남겨두고 그림만 가져간 거예요. 당시 무엇보다 도서관 측에서 예민했던 부분은 한국 대사관 사람들이 알게 될 까봐, 그것을 무척 신경을 썼던 가봐요. 저는 내용적으로 그들이 겁냈던 것을 알 수 없었죠. 그들은 그것을 수선을 해서 파리 국립 도서관으로 옮겨오겠다고 계획을 짰겠지요. 그 당시 수선을 한 다음에 종이에 싸 놓은 것을 제가 제일 먼저 열었다고요. 내용을 보는데 그림이 잘려 있으니까 이건 수선소에서 잘린 것 같다고 바로 말을 해줬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잘라간 것처럼 오해를 받을 테니까요. 도서관쪽에서는 이게 국제문제가 될까봐 겁을 낸 거예요.

 

그런데 내가 도서의 존재를 기자들에게 얘기했기 때문에 책임이 저한테 전가된 거예요. 그 전에는 과장님과 아주 가까이 지내고 친했다고요. 그런데 하루 사이에 사람이 싹 변하는데, 저 멀리에서 나를 보면 돌아서서 딴 길로 가고 그 정도로 냉담해졌어요. 그리고 또 한국 외무부에서는 저보고 가만히 있지 않고 이런 것을 자꾸 끄집어 내서 자기네들 골치 아프게 하냐고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고요. 당시 의궤를 찾았을 때에 대사관에 제가 매일 같이 출근하다시피 했어요. 대사님께 지금 이것이 창고 속에 있으니 우리가 가져가는 것은 문제가 간단하다, 보통 서적도 아니고 파지로 분류되어 있으니까 찾는 것이 간단할 테니 어떻게 좀 힘을 써달라고 했죠.

 

그런데 대사님 말씀은 한불관계가 지금 묘하고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들 비위를 건드릴 수 없으니까 당신이 말할수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저한테 참 잘해주신 분인데, 그 문제만큼은 본인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사실 우리가 가난할때니까 문화재 같은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죠.

 

대사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본국에 보고를 하셨는데 본국에서 묵살을 했는지, 그 분께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가만히 계셨던 것 같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거든요. 당시 제가 매일 대사관에 출근하다시피 하니까, 대사님께서는 '병선이 왔으니까 나랑 가서 점심이나 먹어' 하시면서 매일 같이 쌩 미쉘에 있는 우동집에 갔어요. 가서 먹으면서 저는 또 '대사님, 이 우동이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이 문제가 더 중요한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면, '그 얘기는 그만 하고 밥 좀 먹자' 하시면서 넘어가시고 (웃음).

당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면 외규장각 도서를 쉽게 되찾을수 있었을까요.


도서관 쪽에서는 계속해서 문제가 생기니 신경이 예민해지고, 저는 대사님을 재촉했죠. 당시 국립도서관이 문교부에 소속이 되어 있었는데, 문교부 장관 비서실에 제가 아는 분이 한 분 계셨어요. 그래서 사건이 이런 게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까, 불란서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는 한마디 말이 써있긴 하지만 다른 기록은 없으니 움직이려면 지금 움직이라고, 그 다음에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해주더라고요.

 

그런데 대사님이 움직이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움직이겠어요. 당시 한국은 가난하고 밥 먹기가 힘들 때니까.

제 생각에 그때만해도 한국은 불란서 눈치만 보고 살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건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겠지요. 이해할수는 있죠. 하지만 전 안타까우니까, 이 때 놓치면 안 되는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꾸 졸라댔고, 대사님께서는 또 어떻게 하실 수 없으셨던 거겠죠.

 

대사님께서도 입장이 참 거북하셨을 텐데, 대사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요. 그때는 제가 철이 없이 대사님이 움직여주시지 않으니 답답하고 원망스럽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지독하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요. 왜냐하면 도서관측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고, 저 핍박 받는거 그까짓것은 문제가 아닌데, 우리 쪽에서는 죽은 듯 가만히 있으니까 저는 화가 났던거죠. 당시 저는 젊은 기분으로, 또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빨리 해결하고 싶은데 이쪽에서는 또 다른 사정이 있으니까 할 수는 없고. 이쪽에서 자꾸 조른다고 하니 대사님도 거절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해줄 수도 없으니까 애꿎은 우동만 맨날 사주신거죠 (웃음).


당시 대사님의 입장도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네요.

 

그 대사님께서 개인적으로 저에게 참 잘해주셨어요. 내가 화가 나서 우동 안 먹겠다고 하면, '그러지 말고 가자, 그래야지 내가 우동도 먹잖아' 하고 타이르신다고. 그러면 또 할 수 없이 가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또 그 얘기가 나오죠. 대사님 도대체 어떻게 해요, 왜 가만히 계세요, 그러면 '먹는 것 체해, 가만히 있어' 하세요 (웃음).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대사님께서 얼마나 힘드셨고 어려우셨을까 알겠어요. 그 때는 내가 그걸 모르고 졸라만 댔지, 또 빨리 해결을 안 해주시니까 원망스럽고. 도서관에서 냉대를 당할 때마다 저는 대사님께 원성이 가는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사님 하실 일도 많고, 다른 일도 많으셨을 텐데, 내가 너무 철없이 굴었다는것을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그때는 어떻게 할수가 없었어요 저로서는. '너희 나라 대사관이 있잖냐, 대사님이 움직이기에 달렸으니, 대사님께 매달려 보라'고 또 옆에서 충동질을 해주는 프랑스 교수님들도 있고 하니까 제가 더 용기를 내서 매일같이 출근을 했죠.

도서관에서 나오시게 된것은 그 후의 일인가요?


그 때에도 보도 기관 사람들이 '발견' 소리를 빼달라고 했는데 계속해서 그 말을 쓰는 거예요. 난 그 말 때문에 있는 대로 당하고 있는데. 그리고 나서 도서관 내에서 냉전이 일어난 거예요. 도서관 측하고 나하고. 도서관에서는 나를 반역자 취급을 했어요. 국립도서관의 비밀을 외부에다 누설시켰다는 죄목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백 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도서관에 책이 있다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공고를 해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서관의 임무라 생각하는데, 제가 반역을 한 것도 아니고, 또 도서관에 있는 책이 있다고 말을 한 건데 그것이 왜 비밀이냐, 뭐 때문에 비밀이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죠.

 

그리고 당시 도서가 있으면 카드가 있거나 대장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 카드도 없고 대장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고요. 그런데 한국 기자들은 강화도에서 가져간 외규장각 도서가 국립도서관에 있다고 떠들기 시작하고, 한국에 신문기사가 하나라도 또 나면, 그 신문을 번역을 해서 도서관 내 보도 담당실(service de presse)에 보고가 된다고요, 이런 기사가 또 나왔다고. 이 사람들은 이를 계속해서 문제로 삼으려고 충동을 한 거예요. 이렇게 몇 달이 계속 됐어요. 그 다음부터는 제가 도서관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를 하는 거예요, 뭘 어떻게 하는지. 그것까지도 좋아요. 제가 뭐 나쁜 짓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문제 될 것은 없었죠.

 

그런데 하루는 관장님께서 저를 호출을 하시더라고요. 생각해보세요. 도서관에는 천 여명이나 되는 직원이 있고, 나는 당시 정식직원도 아니고, 말단에 말단, 그야말로 임시기간 직원(saisonnier)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 관장님이 직접 호출을 해서 사표를 내라고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은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거죠. 직원이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예요, 비서를 시켜서 해결을 했겠죠. 호출을 해서 갔더니, 이 사건이 어떻게 된 거냐고 직접 물으시더라고요. 과장도 같이 갔는데, 과장이 제가 오랫동안 그 책을 찾았다는 것을 말하고, 동시에 이것을 도서관 측과 상의하지 않고 외부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듣고 있다가, 도서관에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어떤 책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데 일일이 과장하고 상의를 해야 하느냐, 또 어떻게 그것이 도서관 비밀로 들어갈 수 있느냐, 나는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니, 관장님도 머리골치가 아프신 모양이에요.

 

옆에 있는 관장님 비서도 진정하라고, 결국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리고 일을 좋게 해결하기 위해서 하는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그 책을 찾고 있는 것을 과장이 알았으면, 이 책을 찾으면 자기한테 먼저 말을 해달라든지, 또는 외부사람한테 말을 하면 안 된다든지 했다면 나도 말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않고 자기도 함께 협조해주면서 그 책을 같이 찾았던 사람이 나를 반역자로 모니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어요.

 

그 때 도서관 측에서는 저에게 다른 취직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일년 봉급을 준대요. 그것도 그때서 알았죠. 그런데 저는 그 때 이미 꼴레쥬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필요없다고 했어요. 비서는 나보고 실직자가 아니고 옆에 다른 직장이 있으니 다행이라고 위로하더라고요. 말은 사표지만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죠 (웃음).

 

 

얼마전 파리를 찾은 민주당 5선 김영진의원과 함께한 박병선 박사님, 

그날 김영진의원은 국회에서 박사님이 증언할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약속.



후에 의궤를 연구할 상황이 더욱 여의치 않았을 것 같네요.


책을 자른 범인을 찾는다는 구실로 도서관에서 책을 열람 중지를 했고, 그것이 몇 달 계속됐어요. 그런데 몇 달 동안을 내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아가서, 오늘은 책을 볼 수 있냐고 매일 같이 물었더니, 나중에는 완전히 손을 들었대요. 매번 안 된다고 하면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기권을 하고 말겠거니 했던 거예요. 열람 중지니까 당분간은 내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보통 때와 똑같이 매일 아침 와가지고 오늘 책을 볼 수 있소 없소 하고 묻고, 안 된다고 그러면 할 수 없지 하고 돌아가서는 다음날 또 찾아오고. 나중에는 그 책을 중요도서목록으로 분류해 놓았더라고요. 그리고 그 잘린 부분을 조사한다고 하면서 책에 페이지 수가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책에다가 연필로 한 장 한 장 기록하라고 직원들에게 시켜서 그것을 해놓았어요.

 

그렇게 준비해준 것은 고마운데, 나는 직접 보았으면 좋겠는데 볼 수 없으니 답답했죠. 한 쪽에서는 매일 와서 보겠다고 그러고, 한 쪽에서는 보여주기는 싫고 하니까 그 사이에 갈등이 대단했고, 몇 달이 지속됐어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럼 책을 보여 주겠다, 그런데 하루에 책을 몇 권 이상은 못 준다는 조건을 붙이더라고요. 그래서 몇 권 줘 봤자 나 보지 못하니까 한 권만 줘도 된다 했죠. 그 대신 내가 무슨 책을 봤고, 몇 시에서 몇 시까지 봤다는 것을 일일이 과장한테 허가를 맡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 책을 그냥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신청서를 내면, 이것을 과장한테 가지고 가서 과장이 도장을 찍어줘야만 그 책을 보여줬다고요. 그런데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려고 문의를 하면 어떤 때는 과장이 그 자리를 피한다고요, 그러면 사인을 못해주잖아요. 몇 시간 동안 과장이 어디에 갔는지, 회의에 갔다고 하고 자리에 없으니까, 도장을 받을 수가 없는거죠. 나중에는 책임지고 맡아주는 사람한테 막 대들었다고요,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그랬더니 알았다고 또 자기가 사인을 해줘서 책을 보기도 하고 그랬다고요. 생각해보세요. 매일같이 아침에 가서 책을 보려는데 책은 못 보게 하지, 나는 빨리 봐야겠고, 빨리 해치워야겠는데 그 때 심정이 어떠했을지. 그런데 거기에다가 일일이 며칠 몇 시에 와서 무슨 책을 보고 몇 시에 간 것까지 보고를 하도록 했다고요.

 

나중에는 너무 기가 막힌 것이, 그 직원들이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이라 사이도 좋았어요. 식구도 몇 사람 밖에 안되니까 서로 친하게 잘 지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한테 명령을 하기를, 절대로 나를 도와주면 안 된다고 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어떤 때는 책이 이상스러운데 다른 책으로 바꿔달라고 하면, 이 사람이 나한테 말을 하기를 '미안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지령을 받았기 때문에 너하고 이야기 할 수가 없어' 한다고요. 그래서 밖에 나와서는 이야기 할 수가 있으니 밖에 나와서 이야기하는데, 그 때 하는 얘기가 우리들 모두한테 너를 도와주지 말라고 지령을 내렸다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그 소리를 하더라고요. 그 정도까지 저를 핍박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몇 해 계속되니 나중에는 기권을 하더라고요. 일일이 도장 받고 하는것도 다 없어지고, 그 다음에는 맘대로 다 볼 수 있게 해주고, 하루에 두 번도 보고 세 번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그 동안에 과장도 그만두고, 관장도 그만두게 되었고, 다른 과장이 왔으니까, 그 사람은 무엇 때문에 그런 구속을 해야 되는지 못 알아 듣겠다는 거죠. 도서관에 중요도서가 있고, 보통 중요도서가 있고 그래요. 그런데 이 책을 중요도서에서 보통중요도서로 분류한 거죠.

 

중요도서는 창고 속에 넣어야 하는데 보통중요도서는 서고 속에 놓아도 되요. 그 동안에 자리가 여러 번 바뀐 거예요. 처음에 파지로써 창고에 있던 책이 중요도서로 등장을 했고, 그 다음에는 보통중요도서로 등록을 한 거예요 지금까지 보통중요도서로 되어있어요.

처음 반환 교섭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아시나요?


그 도서에는 카드도 없고, 대장도 없어요. 그것만은 알아야죠. 처음에 프랑스에 반환 교섭을 오신다기에 그 분께 그것을 충고해 드리고 싶었다고요. 왜냐면 아무 소리 말고 도서관에 가서 너희들 카드 좀 보자 하면, 없는 카드를 어떻게 갑자기 만들어 주겠어요. 그리고 대장은 외부사람들한테 안보여주는 것이지만 대장 좀 보자, 그렇게 하라고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그분이 저를 만날 필요 없다고 안 만나고 그냥 갔다고요. 그러니까 처음에 교섭을 하러 오신 분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내용은 모르지만 나는 이쪽 사람들한테 간접적으로 들었어요.

 

교섭 온 분이 책 내용도 모르고 와서 책만 내놓으라고 그러니 말이 되냐, 그러면서 툴툴거리는 소리를 제가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또 무슨 말인가 했어요. 한국 측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은 것이 없어 모르고, 이쪽 사람들을 통해 들은 것이죠. 당시 회의에 있었던 사람들은 절대 내용을 외부에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규칙을 세웠대요. 그런데 툴툴거릴 수는 있잖아요,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그러니까 회의에 갔다가 나와서 내가 옆에 있으니까 '골치 아파' 그러면서 혼자서 툴툴거리더라고요. 그러니까 나를 보고 말하지 않고 자기가 툴툴거린 것을 제가 들은 거예요. 그 사람도 비밀을 지키라는 것 위반한 거 없고요.

지금은 외규장각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그 긴 시간을 혼자 이겨내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한국 학자들의 냉대. 그리고 불란서 도서관 쪽에서 당한 냉대는 정말 지독했어요. 제가 잠을 참 잘 자는 사람이에요. 불면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인데, 그 때는 정말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불면증이라는 것이 이렇게 힘든 거구나, 그 때 처음으로 경험해보고 알았어요. 주변에 계신 분들도 많이 안타까워하시고 저 때문에 고생들 많이 하셨죠.

 

한국에 가면 한번씩은 예전에 저한테 그렇게 냉대하신 분들께 전화를 드렸어요. 그러면 한번 만나자 하셔서 다방에서 얘기를 나누는데, 그 때는 커피를 마셔도 커피 맛이 나지가 않아요. 그 교수님도 그 때 얘기는 꺼내시지도 않고 지금 뭐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만 물으시죠. 그래서 한번은 제가 그랬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말씀 드리면 전과 똑같이 말씀하실 것 아녜요' 하고 웃었다고요. 그러니까 '그건 잊어버려' 그러고 마시더라고요. 어떻게 하겠어요. 그게 세상이고, 그게 인심인가 그렇게 생각해요.

박사님 제일의 마지막 소원은 파리 독립기념관 건립이라고 들었어요.

 

이제 갈 때도 됐고, 빨리 빨리 일을 정리하고 원고도 마쳐야죠. 그런데 가기 전에, 제가 눈감기 전에 한가지 소원이 있어요. 샤또덩 가에 독립기념관을 만들어 놓고, 아니면 만드는 기세라도 보고 죽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몇 십 년 동안 입이 마르도록 독립기념관 만들어야 된다고 했는데, 이제까지는 파리 교민들이 너무도 냉정했다고요. 거기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만들어 뭐하냐는 식으로 그랬었죠. 그대도 지금은 조금이나마 독립기념관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 시작되어 다행이에요.

독립기념관 설립은 왜 중요한가요.


김규식 박사의 활동이 외교 활동의 시초라 할 수 있어요. 파리에 오셔서 몇 달 밖에 안 계셨지만, 같이 일하시던 분이 샤또덩 가의 그 집에서 2년간 버티셨잖아요. 집세가 없어서 방 한 칸에서 지내시면서, '자유한국'도 발행하시고, 꾸리에와 팜플렛도 발행하시고, 회의에도 참석하시고 하셨다고요. 불어를 한마디도 못하시는 분들이. 제 추측인데 여기 사용했던 사무실이 크지도 않았을 거예요. 낮에는 사무실로 쓰고, 저녁에는 그곳에서 주무시고 그러시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무엇보다 그 분들이 그렇게 활동하지 않았다면 불란서에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리지 못했을 거예요. 한국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한국을 알리신 분들은 그분들이에요. 나는 그렇게 봐요. 더군다나 구라파 쪽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독일에도 가셨었고, 영국, 이태리에도 가셨어요. 이곳 저곳 다니시면서 회의에도 참석하시고 한국을 알리셨죠. 이런 일들을 잊지 않아야 해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참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아요. 제 제일 큰 소원이 바로 이러한 것들을 한 데 모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파리 독립기념관을 건립하는 거에요. 우리가 움직인다면 틀림없이 정부도 도와줄 거예요.

 

이상입니다. <이글 스크랩 풀어놓았습니다. 많이많이 알려주세요.>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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