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한국아줌마

파리에서 한국 드라마 보고 우울에 빠져

파리아줌마 2012. 3. 17. 07:41

인터넷이 들어오고 부터는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예전에 남편은 파리에서 한국 신문을 구독해서 소식을 알곤

했었지요.

 

얼마전 우연히 본 큰아이 갓난 아기때 사진 한귀퉁이에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이 담긴 한국 신문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사건이 있었던 1995년에 태어났습니다.

 

당시만 해도 여기선 정말 멀고도 먼 한국이었습니다.

한국으로 전화하는게 큰 일이었고,

편지나 엽서는 도착하려면 열흘 정도는 기다려야 했습니다.

또한 남한이라고 적었어도 우체국 직원의 착오로 북한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고 표기를 상세히 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인터넷으로 한국의 핸드폰으로까지 무제한 통화가 가능하고, 이 메일, 혹은 소셜 네트워크로 모든 소식을 주고

받으며 교류하는 지금의 시대를 상상하기 힘든 때였습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유학을 왔건만 제일 먼저 엄습한것은 외로움이었습니다. 이른바 향수병이라고 하지요.

 

선배 언니는 향수병을 죽을것만 같은 병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곳에서 한국인도, 프랑스인도 아니게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이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말이 가장 무섭더군요.

 

유학생들끼리 모여 한국 찌개를 끓여먹으며 한국말로 수다를 떠는것이 큰 즐거움이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파리에서 한국 영화 상영이 있으면 큰 화젯거리가 되곤 했지요.

 

90년대 파리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비디오 가게가 생겼고, 가끔식 빌려보는 한국 드라마는 저에겐 샘물 같았습니다. 하지만 대여의 번거로움 때문에 쉽게 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인터넷이 보급되고 부터는 한풀이하는것 마냥 한국 드라마를 다운 받아 보았습니다. 한국의 그리워질때는 길거리만 보아도 숨통이 틔이는 듯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옛날에 비디오가 있을때 한국과 프랑스의 방식이 달라 한국의 비디오 카셋을 프랑스 기계가 받아들이지 못해

전환해야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환해서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지요. 무척 불편하더군요. 인터넷도 없고 컴퓨터는 PC 286을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영화 공부하려온 유학생이 있었습니다. 전공이 영화다 보니 집에 좋은 비디오 기기가 있었고, 90년대 초반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그친구의 엄마가 감사하게도 변환하여 보내주셨던겁니다.

당시만 해도 그런 일이 있으면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불러서 함께 보곤 했습니다.

 

나이가 세살 어린 동생 같은 친구였는데 파리에서 친하게 지냈습니다. 센강이 바로 내다보이는 그집에서 놀다가는 자고 오곤 했었습니다. 워낙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였고, 한국 비디오 가게도 없던 시절이라, 반갑고 신기해 하며 보았습니다.

 

일본 식민지하에서 위안부로 끌러간 조선의 처녀가 한국 전쟁을 겪으며 질곡의 역사속에서 휘말리다 결국은 희생 당하는 이야기가 정말 처절하더군요. 처음에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옥[채시라 분]의 아들이 전쟁통에 죽고 난뒤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는 장면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몇부작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룻밤을 꼬박 세워 한국 드라마 한편을 울면서 다 보고 나니 그다음날 상태가 기가 막히더군요.

 

무슨 영광보겠다고 밤을 지새워 드라마를 보았는지... 눈은 퉁퉁 부어 꼬라지는 말이 아니었고, 가장 심각했던건  심한 우울이 오더군요. 아찔할 정도였습니다. 외국에서 향수에 젖어 있다가 본 한국 드라마, 그것이 유쾌한게

아닌 비극적인 줄거리를 밤새 울어가면 보고 난 뒤에 오는 우울은 사람 잡겠더군요. 미련했습니다.

 

마치 드라마 이야기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것 같더군요. 바로 집에 가면 안될것 같아 센강을 일부러 산책했습니다. 햇볕을 쏘이고 바람을 맞고 나서야 정신이 들면서 현실로 돌아올수 있었습니다.

 

지난주 힐링 캠프에 채시라씨가 나와 <여명의 눈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길래 떠오르더군요.

예전에는 한번씩 추억의 앨범을 펼치듯 이 일을 꺼내어 미소 짓곤 했었는데 몇년 동안 잊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우울도, 향수도 없습니다. 이유는 인터넷 발달로 한국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수 있기 때문인것 같기도 하고, 더 중요한건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고 하고 싶네요. 그러고 보니 편안한 유학생이었던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드신다면 손가락 모양의 추천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필요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