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가끔씩 휴지를 코에 대면 매케한 최류탄 냄새가 나는 듯하다.
지난 날 기억의 파편처럼 박혀있는 최류탄과 휴지가 결합된 야릇한 냄새가
나의 의식을 밀고 들어올때가 있다.
잘잘못을 따지기 보다는 지난날 나의 젊은 푸르른 날의 한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는, 아파하며 몸부림쳤던 순간들을 떠올리고 싶어졌다.
그당시 무엇이 그리도 나를 괴롭혔으며, 고민스럽게 만들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젊음"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설익은 것 같은 그 무엇,,
"젊음"이라는 핑계가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이렇게 핑계거리라도 만들어야하는 이유는
나는 사이비 운동권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를 "사이비"라고 하는데는 내가 가졌던 "사이비성"도 있었지만,
그당시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며 희생된 이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이른바 90년대에 명명되어졌던 "386 세대"이고,
1980년 광주 항쟁 5년뒤인 1985년에 대학교에 입학한 85학번이다.
일제 강점기도 아니고, 6. 25 전쟁을 신랄하게 겪은 세대도 아니었지만
그이후 앓아야만 했던 후유증을 함께 했던 세대인 것 같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읽고 온 몸을 부르르 떨었고,
마르크스의 "사회 계급론"이 그렇게 재미있을수 없었다.
이른바 동지들과 함께 토론하기 위해 밤새워 책을 읽었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양심"이라는 기치아래,
무서웠지만 시위 대열에 끼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제일 뒷줄에,,,
제일 힘들었던 것은 "가피"라고 해서 주택가 유인물 배포 작업이었다.
"주민 신고 센터"라는 푯말이 붙인 집은 당장 신고의 위험이 있기에 피해서가야만 했고,
언제 어디서 유인물과 함께 형사들을 만날지는 알수 없는 일이었다.
함께 했던 이들에게 나의 두려움을 내색할수 없어, 항상 눈만 부릅뜨고 있었던 것 같다.
나서기도 무서웠고 나설 능력도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거철이 되어 "공정 선거 감시인단"에 그당시 야당 인사였던
김대중씨쪽으로 내이름이 올라져 있는 것을 동장님께서 친절하게 아버지께 알려주셨다.
그이후로 난 며칠동안 금족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몰래 빠져 나가려다 아버지께 들켰고,
나를 보고는 웃으시기에,,호락 호락 넘어가주실줄 알았던 아버지는 너무나 완강했다.
베란다에 걸터앉아 나가게 해돌라고 징징거리며 울고 있는 "젊고 어린 나"를 본다.
학교 마치고 바로 노동 현장으로 가리라고 마음먹었고,
나의 기득권 모두 포기하고 부모님과 헤어져 소외받는 계급을
몸소 체험해가며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하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지내왔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기득권을 포기치 못했고, 세상과 약간의 타협을 했다.
"지식인 운동"으로 방향을 틀었고, 학교 마치자 마자 바로 유학을 떠났다.
어느 누구 하나, 반대하거나 비난하거나 실망의 빛조차도 띄는 선배도 후배도 없었다.
지난번 한국행에서 20년만에 이들을 만났다.
열심히 살고 있는 후배가 있는가 하면, 영화 "오래된 정원" 같은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괴로워하며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있는 선배도 있었고,
부모님께 받은 부를 즐기며 이루지못한 민주화의 꿈만을 탓하며
성실치 않게 살고 있는 같은 학번의 동기도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우리를 중년으로 만들어 버렸고,
지난 푸르른 날에 가졌던 이상들은 또 다른 형태로
현실과 어우러진채 우리들의 삶속에 자리 매김해가고 있을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지만 이제는 내가 변하는게 먼저라고,,,
그동안 지나간 시간들이 나에게 가르쳐 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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