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살아가기

삶의 함정

파리아줌마 2008. 6. 28. 01:18

지난주 금요일 쯤이었던 것 같다.

스카치 테이프가 필요하다던 큰 딸에게 학교 마치고 바로 옆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사오라고 10유로를 건네주었다.

10유로면 한화로 1만 4천원쯤 될 것이다..

 

이에 딸은 방학 동안 연예인 사진 스크랩 할 노트를 한권 사도 되겠냐

물어서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필요한 것들을 사가지고 귀가한 딸은 영수증과 함께 나머지 돈을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

그런데 영수증 밑에 깔려있는 나머지 돈 액수를 보고 나는 의아해 했다.

보통 그정도면 3,4유로는 남아야되는데,, 고작 50샹팀짜리 동전과 그보다 작은 단위의 잔돈만이 있다.

 

딸은 수퍼앞에서 "Pompier"[구조 대원]를 만났는데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느냐고 묻더란다.

그래서 딸은 "사람들을 구조하잖아요"라고,,,

그리고는 자기들 부대에서 축제를 하는데 선물 추첨권이 3유로인데 사지 않겠느냐

해서 그것 사주느라고 돈이 이것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나 자신있게 이야기하는데 나는 정말 기가 막혔다.

 

"너, 왜 엄마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것을 샀니?..

금방 무엇인지 알아차리고는 "잘못했다"고 한다.

"왜 그랬니?"

"왜냐하면 사람들을 구하는 Pompier가 부탁하니까"

"그래? 그런데 왜?"

"사람들을 구하니까",,,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옆에 비어있던 피티병으로 딸의 머리를 한대쳤다.

"정신 안차릴래? 무엇을 위해서 그랬니?

 

상황의 험악함을 판단한 딸은 그제서야 "나 잘난 척하고 싶었어"하고 고백한다.

그래,, 너 그렇게 잘난척하고 싶으면 네 용돈으로 잘난척하지 왜 허락받지 않은

엄마 돈으로 잘난척 하니?

그날 딸은 나에게 많이 혼이 나고는 본인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절실히 느끼는 듯했다.

 

이 문제는 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딸은 절대로 허락 받지 않고 제멋대로 사탕이나 빵을 사먹는 아이가 아니다.

차라리 허락 받지 않고 사탕을 사먹었더라면 그렇게 자신있게 이야기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혼날 각오를 하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딸은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바르게 살아가려고 하는 이른바 모범적인 아이다.

나는 여기에서 바르게 잘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질수 있는 엄청난 함정을 발견한다.

물론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순진한 딸을 현혹시킨, 한번 보지도 않은 그 구조대원에게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 구조 대원이 문제가 아니고 딸을 조심시켜야만 했다.

겉으로 보이는 좋은 명분들에 무조건 빠지지 않도록, 구분할수 있는 지혜를

길러주어야 하고, 그런 것들에 유혹되지 않도록 강하게 키워야 한다.

 

"사람을 구하는 구조 대원" 들의 행사, 좋은 것이다. 그리고 될수 있으면 도와주면 좋겠지,

항상 "미혹의 영"은 이렇듯 허울 좋고, 명분 좋은 것으로 다가오겠지

하지만 이런 것들에 구분하지 못하고 갔을때 우리의 삶은 깊은 함정에 빠져

허우적 거리게 될 것이다.

 

한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확~~ 이끌렸을 딸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 구하는 이들의 행사에 추첨권 사주었다고 잘했다고 그대로 내버려두었을때,

딸은 좋은 일에는 무조건 본인의 상황과 주제 파악도 못하고 함부로 돈을 써버리는 경제 관념

이상한 아이로 성장했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해진다.

 

나는 무조건 "좋은 게 좋다" 는 것에 반대한다. 구분하며 살아가기를 원한다.

이렇듯 좋은 게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을 넘어서서 이상하게 가버릴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휴지통에 꼬깃 꼬깃해서 버려진 추첨권을 발견하고는 딸이 제대로 깨닫은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이 쉬어진다.

 

분별할수 있는 지혜를 오늘도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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