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보다가

식객, 최불암님의 부성애와 카리스마 연기

파리아줌마 2008. 7. 21. 20:26

 

우리 가족들은 주말에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난 뒤 함께 한국의 정취를 느낄수 있는 간단한 시트콤

한편 정도를 보고는 편안한 주말 밤을 맞이하곤 한다.

얼마전 재미있게 보던 시트콤이 종영이 되고 그다음으로 무얼 볼까하고 궁리하던 차에 누군가가 현대판 대장금이라고

"식객"이란 드라마를 소개해주어 요즘 한창 재미있게 보고 있다.

 

여러 캐스팅들중 오숙수 역할에 최불암님을 보고는 마치 오래동안 뵙지 못했던 동네의 친근한 분을

다시 대하는 듯한 반가움을 느꼈다. 아마 내가 19년전 한국을 떠나고는 처음으로 드라마에서 대하는 듯했다.

 

60년대에 태어나, 70년대에 어린시절을 보내고, 80년대에 청소년, 청년의 시기를 보낸 나 같은 사람에게

최불암님은 "수사반장"의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계 반장으로서, "전원일기"에서 전형적인 시골 이장님으로서,

그리고 어린 시절 나에게 아주 인상적이었던 단편 드라마, "아배"에서는 평범한 시골의 농사 짓는 아버지가

6. 25를 겪으며 시대의 소용돌이속에서 희생되어 가는 모습을 열연했던 것에서

수사반장의 카리스마 넘치는 인상보다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아버지의 상으로 더 깊이 각인되어있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의 상"인 최불암님이 이번 드라마 "식객"에서 가슴으로 낳은 자식 "이성찬"을 대하는 부성애 연기와

오랜세월 운암정을 이끌어 왔던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카리스마적인 모습이 함께 어우려져 그의 40년 연기 인생에

꽃을 피우는 듯했다.

 

앞머리는 그대로 둔 채 뒤로 묶은 머리 모양새와 약간은 일부러 가늘게 내뱉어지는 목소리,

반가운 손님을 대할때면 손목을 힘없이 떨구며 손사래를 치는 모습들이 예전에 보아왔던 최불암님의

모습과는 사뭇 거리가 있으며, 약간의 간사스러움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이는 최고의 요리를 만들기 위해 애쓴 오숙수의 예민함과 섬세함이

최불암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성찬을 향한 오숙수의 마음은 아버지 이상이다.

10회에서 잠시 운암정을 들린 성찬에게 따뜻한 밥한끼 해먹여 보내려 손수 쌀을 씻는 모습과,

함께 밥을 먹으며 그의 왼쪽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한줄기에서는 아버지의 그것을 넘어서, 엄마의 정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묵인하며 운암정을 이끌어가는 봉주와 이에 맞서는 성찬 사이에서

깊이 갈등하며 뭐라고 말한마디 하지 못하고 성찬에게 "네 마음 다 안다"며 두 부자는 눈물 지으며 식사를 한다.  

 

말한마디 없이 운암정을 떠난 성찬의 집을 찾은 오숙수의 첫마디가 "너 보고 싶어 왔다"였다.

이 간단한 말 한마디 보다 더 깊은 의미의 말이 있을까?

다시 운암정으로 돌아가자는 권유에 성찬은 반대하고 어떠한 이유도 묻지 않고,

오숙수"기다리겠다"는 말로 답하면서 돌아오는 차안에서 혼자 가슴 아파한다.

 

10회 동안 보아오는데에 오숙수는 절대로 누군가가에게 감정을 드러내거나 그로 인해 이루어진 것들을 강요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감정은 혼자 아파하고 있다.

대령숙수의 대를 잇게 하라는 선친의 유언은 있었지만 고아된 성찬을 데려다 요리사로 키우다, 어느날 말한마디 없이

떠나버린 아이에게서 인간적인 배신감이 당연히 느껴질만도 한데 오숙수는 그본능을 뛰어넘는다.

 

오숙수는 자신과 의견이 다를지라도 강요하거나 그로 인해 심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는 상대방을 철저히 인정해준다. 아닌 길을 가려는 이들에게 알려주기는 하지만 강하게 반대하지 않는다.

돌아올때까지 기다릴려고 한다.

이는 오봉주의 운암정 증축 계획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증축 보다는 궁중요리를 고수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권하지만 아들 오봉주는 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계획을 추진한다. 그로 인한 모든 고통을 혼자 감수하고 있는 오숙수이다.

 

 

아마 오숙수성찬에 대한 애착은 본의 아니게 오랫동안 대령숙수의 후손임을 자처했던 거짓에 대한

회한도 배제할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시대의 어두움속에서 잠시 옆으로 나아갔던 것을 바로 잡고자 했던

오숙수는 육신으로 낳은 자식, 봉주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운암정의 후계자로 성찬에게 기회를 주고자 하면서,

그의 팔은 안으로 굽기 보다는 바깥으로도 뻗어갈수 있는 크고 강인함이 있었다.

 

그 강인함이 가슴으로 낳은 자식, 성찬을 한없이 품게 만들고, 

운암정을 성공으로 이끈 그의 원동력이었지 않았나 싶다.

 

이 모든 것들이 최불암님이기에 가능할 것 같다.    

성찬이 운암정을 나가고 두번 정도 오숙수와의 만남의 장면들을 보면서 자꾸 눈물이 난다.

눈물 흘리는 것을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선뜻 티슈를 집으러 가지도 못하겠어서,

그냥, 그것도 짧은 티셔츠 팔자락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궁상맞게 닦았다.

둘째가 아무 표정없이 드라마 보며 눈물 흘리는 엄마를 바라본다.

 

이 모든게 최불암님 때문이다.

늙어 늘어진 눈꺼풀 사이로 보일듯 말듯한 눈빛속에서 느껴지는 감동의 연기가 나를 그렇게 궁상맞게 만들었다.

그분의 눈빛은 눈꺼풀하고 같이 느껴진다. 눈꺼풀 또한 눈빛인듯하다.

 

이런 저런 상황속에서 인간이 일차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사람마다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문제는 그다음 이를 어떻게 추스리냐일 것이다.

오숙수는 사사로운 자아를 버리고 더 큰 자아를 붙들은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의 고통은 좀더 무거울수 밖에 없으리라

 

부성애과 카리스마를 분리시키고 싶지 않다.

내 새끼의 모든 허물까지도 품으며 기다려 줄 수 있는 부성은

이 세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카리스마가 아닌가 싶다.

그 마음은 상대를 존중할줄 알며, 보다 큰 것을 위해 나를 버리며,

군림하기보다는 섬기는 자세로 이세상속에서도 성공을 이룰수 있으리라.

 

운암정 증축 계획 프로젝트를 뒤로 하고 누빈 흰 두루마기를 입고 착찹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최불암님의 모습에

증축을 반대한, 이른바 시대의 변화와 함께 하고자 하지 않는 이에게서 느껴지는 어색함은 찾아볼수 없다.

차라리 멋스러움마저 느껴지는 것은, 시대가 변함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아야 되고 변할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이에게서 느껴지는 단호함과 당당함이었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