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일상중에 누리는 사치

파리아줌마 2009. 1. 19. 08:13

우리집은 아침 9시면 아이들 학교가고 남편은 일터로,, 

그리고는 나는 집안 정리부터 시작한다.

그전날 밤까지 둘째 딸의 상상력을 억제하지 않기 위해 내버려둔 집안은 

군데 군데 종이들과 색연필, 장난감과 책들이 나뒹굴고 있다.

 

"이건 뭐 상상력 키워주려다가 아이의 정리하는 습관은 엉망이 되겠구먼"

궁시렁거리며 치우기 시작한다.

 

창문을 활짝 열어 묵었던 공기 바꾸고, 이불 털고,

그러다 먼지를 닦아내던 손길이 오디오에 머무는 순간 아~,

지난 크리스마스 방학 동안 온 가족이 함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재미있게 보고 난이후, 클래식 음악에 다시 이른바 삘~~이  꽂혔다.

그동안 장롱속에 처박아 놓았던 클래식 CD들을 다시 끄집어 내어,

cd 3개를 오디오 플레이어속에 넣어 두고 요즘 혼자 있는 시간에는 이 음악 듣는게 큰 즐거움이다.

 

그럼, 왜 가족들이 함께 있을때는 음악을 듣지않을까?

왜냐하면 우리 가족들 모두, 각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들이라,

이 고급스러운 음악이 한갖 소음에 지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청소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음악 들으며 신나게 청소해야지"하는 마음으로,

진공 청소기의 줄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가운데 오디오의 cd1을 누른다.

"베토벤 로망스 2번",

음악이 흐르자 그냥 의자에 주저 앉는다.

 

항상 베토벤 로망스를 들으면 80년대초,,대문을 통과하여 길게 뻗어 있는 길을 지나면

단아한 정원과 연못이 교실들에 둘러싸여 있는 곳,

교실 건물들을 잇는 구름 다리 위, 아래로 햇살 찬란한 아침, 선배언니들의 종종~~ 바쁜 걸음들이 생각이 난다.

 

옅은 곤색의 교복과 하얀 카라,, 검은 스타킹에 둘러 싸인 가녀린 발목아래 발에 꼭 달라붙는

실내화를 신고는 1교시를 시작하기 위한 발걸음들,,

교내 아침 방송 배경음악이었다.

이 애잔하고도 섬세하며 여성스러운 분위기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방송반 언니의 멘트로 여고생들의 하루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따스한 겨울 햇살이 내리쬐던 어느날 교내 잔디밭에 둘러 앉아 수다떨던 우리들,,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우직하게 나의 옆자리에 있어주었던 친구,

조금은 날라리 같았던 또 다른 친구,,

 

머리 자율화가 되었고, 너나 나나 할것 없이 귀밑에 찰랑거리던 단발머리를 컷트했었던 시절,,

"니는 두상이 예뻐 컷트해도 괜찮을끼다."고 했던 엄마의 나직한 한마디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옅은 곤색 교복에 짧은 컷트 머리를 한 우리들이 내뱉었던 쫑알거림과

웃음소리가 베토벤 로망스와 함께 들리는듯하다.

 

순진한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절,,마냥 순진하고 싶었던,,,

나이가 들어도 순수함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던...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기를 두려워했던 답답한 여고생의 모습이 바이올린 선율을 타고 다가온다. 

 

세상이 막연한 두려움으로만 다가왔었고, 실패도 실수도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것 같아 열심히 앞만 보고 갔었지..

인간에 대한 경멸도 많았고 비판도 심했기에 오만함도 많았지,,

무엇으로 사는것 보다는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며 고민하기는 했지만,

그 모든 와중에도 나를 지키는게 어떤건지는 한번도 생각지 못했던 어설프던 때였지..

 

그때의 막연함은 이제 구체화되었고, 그동안 실패도 있었고 실수도 많았으며,

경멸과 비판보다는 이해해 보려고 하고, 나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들을 해야되는지 기도하고 있는 지금,,,,

 

아직 넘어야할 산도 건너야할 강도 많겠지...

산이 가로막고 강이 발걸음을 멈추게하면 그래도 예전보다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높은 산을 넘고 깊은 강을 건널 준비를 하지 않을까? ㅎㅎ

 

음악을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해야될 일이 많은 날일수록 이렇게 더 늑장을 부리며 여유를 가져본다.

 

매일 그날 저녁 반찬거리 걱정하고, 얼굴은 교회가는 날만 빼고는 항상 쌩얼~~,

식사 준비하는 손이라 요즘은 손톱에 매니큐어는 칠하지도 못하고 있다.

조금만 길어 나와도 손톱깍이를 들이댄다..

 

전세계가 경제 위기속에 있는 지금,,

긴축 재정으로 세일때인데도 쇼핑나가기가 주저되며,

평상복과 잠옷 따로 구분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아줌마 생활 와중에,

혼자 클래식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며 옛생각에 잠시 잠길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치인것 같다. ㅎㅎ

 

일상중에 누릴수 있는 정서적,,, 정신적 사치,,

 

ㅎㅎ 이제 그만하고 청소를 계속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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