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벌써 14년..

파리아줌마 2009. 4. 5. 17:09

결혼한지 일년이 지난 1994년 여름, 동생의 결혼으로 한국을 다니러가게 되었다.

지금이나 예나 똑같이 항상 바빴던 남편은 나를 좀 늦게 공항에 데려다주는 바람에 수속순으로 뒷좌석에 배정이 되었다. 

그때 KAL에는 흡연석이 있었던 시절, 비행기 뒤쪽 두칸은 흡연자들을 위한 공간들이었는데,

그좌석에서 장시간의 비행을 감당하고 가야만 되었었다.

 

그당시 이상하게 몸이 물에 젖은 솜같이 무거워 비행이 걱정되어 기내에서 갈아입을 폭넓은 편한 치마까지 준비해 갔다.

 

현기증을 동반한 울렁거림이 있었고, 

더군다나 담배연기까지 맡으며 한국까지 갈 생각에 앞이 캄캄했다..

 

"도대체 내 몸이 왜이러지", 매사에 무기력했고, 손가락 하나까닥하는 것도 힘들었던 때였다.

 

바로 옆좌석에 앉은 남자분이 "담배 피지 않는다면 이렇게 가기 힘들거라"며 나를 걱정해준다.

그러면서, "조금있다 우리 일행이랑 자리 바꾸어가라"고 한다.

"뭐,.,그렇게까지" 싶어,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턱수염이 짙게 있는, 조금은 인상이 험악해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강한 인상과는 다르게 나를 걱정해 주는 말투에

따스함이 느껴졌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쪽지 한장을 주면서 몇번 좌석에 있는 사람에게 건네주고 거기에 있으라고 한다. 

몸이 너무 힘들었기에,, 어쩔수 없이 그분의 제안을 따랐다.

쪽지에는, "000씨 이리오시요" 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던 것 같다.

 

어기적어기적~~ 비행기 좌석 번호들을 보가며 뒤로갈 그분이 있는곳으로 가서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같은 이코노믹석인줄 알았는데, 그곳은 2등석인 비즈니스석이었다.

그분에게 너무 미안해,,안절부절,, 어쩔줄을 몰라하다,

"언제든지 불편하시면 바로 오시라"고 그렇게 말하고는 그자리에 앉아 가는데,,

그 조용함과 넓은 좌석의 편안함은,, 살 것 같았다..

 

12-13시간의 비행에서 5시간 정도 그자리에 있으면서, 무엇에 그리 지쳤는지 곤하게 잠도 자면서 아주 편안할수 있었다.

편한 자리에서 잠을 자고 난뒤 몸이 괜찮아졌을 즈음에 그분이 다시 오면서 자리를 비켜주고는 뒷자리로

가서 턱수염 아저씨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고는 어떤분인지 궁금해져서 몇마디 대화를 하면서,

대구에서 전시회를 위해 파리에 있는 한국 작가들을 데리고 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갤러리 명함을 주셨고, 여름이라 성수기여서 이코노믹석 좌석이 없어서 일부 일행들은

비즈니스석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분이 나를 살려준 것 같았다.

 

전시회때 "꽃다발 들고 꼭 찾아 뵈어야지"라며, 감사한 마음에 비행기 내릴때 다짐해 놓고는

찾아뵙지 못했다.

 

그해 아스팔트가 눅눅해질 정도의 대구의 더위속에서 동생 결혼 준비에 바쁜 엄마를

따라 다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수 없이 무기력했다.

아버지, 오빠의 말한마디에 예민해져서 훌쩍거리곤 했고,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영문도 모른체 답답하기만 했다. 

 

동생 부부는 파리로 신혼여행을 왔고, 함께 유럽을 여행하고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뒤,

동생에게 잘못해준것 같아,.. 동생이 두고간 비누각만 봐도 눈물이 철철~~흘렀다.

그리고는 뭔가 이상해서, 가까운 동네의 labo에 가서 피검사를 해보았고,

나는 큰딸, 유진이를 가진것을 그때 알았다.

 

어쩜 그리 무뎠는지,, 무슨 병에 걸린 것만 같았지,, 임신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랬었구나." 그동안 이해할수 없었던 몸과 마음의 어려움들이 그래서였다.

"비행기에서 고마운 분을 만난 것도,,더욱 예민해진 감정들도,,,무기력함도,

모두 그것 때문이었구나"

 

그동안 가끔씩 그때 비행기에서 힘들어하는 나를 편안하게 해 준 그분 생각이 난다.

"아직도 갤러리 사업을 계속하시는지?", 고마운 분의 명함까지 받아놓고는 한번도 찾아뵙지 못했고,

존함조차 기억하지 못하는게 죄송스럽다.

나의 몸속에 생명이 잉태되고 있는지 나도 모르고 있는 동안, 태아였던 유진이는 보호받고 있었다는 것이 한없이 감사했다.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있다"는 신비로움과 기쁨으로 길을 걷는데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그아이가 이제 14살이 되었다.

 

임신 사실을 알았던 그때의 기쁨이 무색하리만큼, 임신 기간 동안 조산 위험으로 입원도 했었고,

육아로 힘들었던 것들, 그리고 지나간 또 다른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지..

 

처음 학교 보내놓고 동양인이라 혹시 차별받지는 않을까 가슴졸이기도 하고,

1998년 IMF의 어려움속에서, 3살밖에 안된 조그마한 유진이가 옆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얼마나 큰 위안이 되던지,,,

 

그렇게,,때로는 근심으로,, 때로는 위안으로,,,때로는 기쁨으로,, 아이가 14살이 될때까지 키우면서

돌아보니 엄마인, 내가 더 많이 자란 것 같다.^^

내가 딸을 키우면서, 딸은 다른 면으로 나를 키우고 있었다.

 

이제는 친구처럼 이런 저런 엄마의 푸념을 늘어놓아도 들어주는 딸,

엄마 자신도 인식 못하고 있던 어리섞음을 날카롭게 지적해주기도 하는 딸이  지난 3월 28일,

14번째의 생일을 보내었다.

 

그렇게,,벌써 14년이 흘렀다.

 

친한 친구 몇명과 학교옆, 맥도날드에서 조촐한 파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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