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한국아줌마

삶은 부메랑 같은것, 유학시절의 에피소드

파리아줌마 2010. 4. 28. 01:02

예전 대학 1학년때, 교양과목으로 영어수업을 들었다.

수업중 교수님께서는 미국유학 갔을때, 비행기에서 내리고나서부터 함께 온 가족들이 교수님이 웃으면 함께 따라 웃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 함께 심각해지곤 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언어 소통이 되지 않았기에 교수님, 그러니까 남편, 아빠의 표정하나만으로 일이 순조로운지 어려운지를 짐작하고는 가족의 연대의식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그이야기를 듣고는 교수님과 가족의 모습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상상이 되길래 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당시 내가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신 말씀같기도 한데, 왜, 무엇을 위해 그런 이야기를 꺼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고 내용만 기억난다.^^ 교수님은 비록 지난 일을 이야기한거지만 그당시는 외국땅에 도착해 적응해나가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 남의 곤란했던 일이 나의 즐거움이 되어버려 그날은 키득거렸지만,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일이 있었으니,

 

20년전 이곳에 유학을 올때 6개월 먼저 와있던 선배 언니의 도움을 받을수 있었다.

나의 부모님은 어린[?] 딸내미 머나먼 외국땅으로 보내면서 그나마 안심할수 있었던 것은 그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항에 마중나와있던 언니의 인도로 택시를 타고 잠시 거처할 집으로가 짐을 내려놓고 에펠탑부터 가보았다. 낯설고 물선 곳으로 온 나는 친절한 선배언니의 안내를 받으며 따라다녔다.

언니는 워낙 똑똑해 유학 생활을 어떻게해야되는지 파악하고는 필요한 것들을 잘 일러주었다.

 

비록 불문학 학부과정을 마치고 왔지만 단어를 먹으면서[?] 내뱉는 프랑스 사람들의 말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당시 언니의 말한디는 나에게는 절대자의 명령같았다. 이리가라면 이리가고 저리가라면 저리가고 나는 따라야만 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영어교수님의 가족의 모습이나 다를게 없었다.

 

어느날 언니와 함께 대형슈퍼에 가서 장을 보게 되었다. 언니는 공부하려면 잘먹어야 된다며 어느코너에서 꺼내온건지 소시지 하나를 내 장바구니에 넣어주었다. 투명 비닐에 싸인 두툼한 아주 고운 분홍빛 소시지였다. 그리고는 잠시 기거하는 집으로 와서는 식사준비를 했다.

 

파리 12구에 있는 빌라 방한칸을 언니가 얻어주어 잠시 머물던 중이었다. 조그마한 부엌의 창문을 열면 옹기종기 모여있는 빌라들의 뒷마당이 나오는데 전형적인 유럽의 분위기가 느껴져 아주 운치있었다.

엄마가 한국 떠날때 준비해준 쇠고기고추장조림과 오징어무침을 밑반찬으로 그리고 정성스레 잘라 구운 소시지와 함께 창을 활짝 열고 유럽의 분위기를 물씬 느끼며 식사를 했다.

 

소시지를 한입베어 무는데 입안의 느낌이 역하다. 육식을 즐기지는 않지만 소시지는 싫어하지 않는다.

문득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소시지를 먹나?"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입안에 조그마한 뼈까지 씹힌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남은 소시지를 살펴보니 귀퉁이에 조그마하게, 아주 조그마하게 예전 초등1년 국어책에나 나온듯한 귀쫑긋한 <바둑이> 그림이 있었다.

 

그것은 견공들이 먹는 소시지였던 것이다. 

선배언니가 집어서 장바구니에 넣어준 소시지는 당연히 나를 위한 배려였고, 한번더 살핀다는 것은 그녀를 못믿는 불온한 짓이었다.ㅎㅎ 어찌 영어 교수님의 이야기를 단순히 키득거리며 들을수 있었는지.

 

선배 언니는 6개월뒤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고 그이후 나는 홀로서기를 해야만 되었다.

덕분에 비록 개밥은 먹었지만 그녀가 있었기에 유학 생활을 순조롭게 시작할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일이후 슈퍼에서 두터운 소시지를 고를때면 요리조리, 앞뒤전후 <바둑이>그림이 있는지 잘 살펴보는 습관이 생겨 수많은 시간이 흐른뒤에야 없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