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한국아줌마

프랑스에는 매달 공습경보가 울린다.

파리아줌마 2010. 5. 13. 23:24

5월의 첫번째 수요일이었던 지난 5월 5일 정오, 예나 다름없이 둘째 아이를 음악 학교에 데려다 놓고 집에와서 점심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온몸의 신경을 자극하는 사이렌이 울린다. 본능적으로 흠찟~ 놀라고는 이내 짜증이 엄습한다. 별것[?]도 아닌 사이렌 소리에 놀란 것이 억울했고, 소리자체의 불편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이렌은 오래전 한국에 있을때 "실제상황"이라고 외치던 함성과 함께 울러퍼졌던 소리와 닮아있었기에 더 기분이 좋지않다. 천지가 떠나갈듯한 사이렌 소리. 

 

하나의 나라가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다.

강대국에 의해 싸움을 쉬고 있었던 나라에서 다시 싸워야된다고 알리는 소리가 어느날 들렸다. 그때가 80년대 초반, 나는 여고생이었다. 당시 엄마는 전화 통화중이었고, 아버지는 이발하러 가시고 집에 안계셨다. 일요일이라 TV에서 가요프로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청바지를 입은 가수 전영록씨가 <종이학>을 안무와 함께 마이크를 잡고 열심히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가수의 노래 소리 대신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그리고는 어떤 아저씨가 급박한 목소리로 "실제상황"이란다. "국민여러분, 국민여러분"을 여러번 외쳤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를 급박하게 만들어준 소리였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피가 거꾸로 흐르는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방과 마루를 왔다갔다 했던 기억만 난다.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는 생각도 없었고, 단지 그상황이 너무 무서웠다. 사이렌 소리와 메가폰으로 울려퍼지는 급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TV를 통해 들리는 그 상황.

그리고 살벌하게 무서웠던 그때는 "실제상황"이 아니었고 북한의 공군 조종사가 귀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때부터 민방위 훈련을 해서 사이렌 소리에 익숙해있지만 이곳, 프랑스에서 들은 소리는 항상 그날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민방위 훈련시 울리는 소리는 귓전을 흐르며 지나가는 사이렌 소리인데, 프랑스의 그것은 사람의 온 신경을 뒤집어놓는듯 강도가 세다. 가슴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는 휘감아 오르는 듯한 소리이기에 그날을 기억하게 되는것인가보다.   

 

프랑스는 매달 첫째주 수요일 정오에 경보 사이렌이 울린다.

예전에 궁금해서 프랑스 친구에게 물어보니 2차 대전이후 국민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늦추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그런 시절이 있었다지만 경각심 운운하며 프랑스인들의 느슨함을 확실하게 깨울 싸이렌은 너무한것 아닌가 싶어 알아보니 그건 사이렌이 잘 작동되는지에 대한 테스트라고 한다. 이렇듯 프랑스인들 조차도 매달 첫째주 수요일 12시 정각에 울리는 사이렌에 대해 모르고 있다. 우리처럼 민방위 훈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12시 정각에 울리고 10분뒤에 또 한번 울린다. 평온한 일상을 방해하는 불청객이다.

 

사이렌은 프랑스 국가 경보망[Reseau National d'Alerte]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나라 전체에 4천 5백개의 사이렌 시스템이 있다고 한다. 자연 재앙이나 핵관련 사고시 국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경보장치이다. 사이렌 음향은 2차 대전시 공습 경보를 알리는 것과 같다. 이것도 1990년부터는 법으로 정해놓고 2005년, 2007년 두차례에 걸쳐 개정안까지 만들었다.

 

파리 소르본 대학 근처, 어떤 식당옆 벽에<1944년 8월 25일에 로베르 파이가 22살의 나이로 이곳에서 죽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판,

그밑에는 그의 소속 군대 이름인가보다. 파리시내를 다니다 보면 자주 이런 판들이 눈이 띈다.

 

2차 대전을 겪으며 5년동안 독일의 점령하에 있었던 프랑스였다. 파리거리 곳곳 벽에는 독일군에 대항하다 그자리에서 산화한 프랑스 병사들을 기리는 벽판이 있다. 언제, 누가, 몇살의 나이에 이곳에서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 갔다고 적혀져 있다. 그리고 때로는 화사한 꽃까지 놓여져있다. 66년이 지났지만 그들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매달 첫째주 수요일 정오에 울리는 사이렌은 66년전의 아픔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자국민들을 보호하겠다는 프랑스의 정신으로 받아들인다. 언제즈음이면 이 사이렌 소리에 더이상 흠찟 놀라지 않고 단순히 정오를 알리는 소리로 들을수 있을지 모르겠다. 5,18과 독재정권의 후유증을 겪으며 80년대를 살아온 나에게 그건 묘연한 문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구의 반대편으로 와서도 한달에 한번씩 악몽같이 그날과 그시대가 떠오른다.

 

그리고 66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어간 이들을 잊지 않고 기리는 프랑스인들을 보면서, 해군함대의 침몰로 46명의 아까운 젊은 목숨이 사라지고 두달이 지나도 원인을 알수 없는 나의 슬픈 조국이 있는한 나는 또다시 사이렌 소리에 몸을 들썩이며 놀라지 않을까 싶다.

 

또한 2년전 국민들이 먹거리를 위해 촛불든 것을 반성하라고 하는 내나라의 대통령이 있고, 표적수사로 전직 대통령을 자살로 몰아가게 만든 검찰이 있으며, 재개발에 대응해 삶의 터전을 지키려다 죽어간 이들이 있는한, 한달에 한번 찾아오는 나의 악몽은 사라질수 없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의 테스트용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묻어놓았던 내나라의 아픔들을 떠올리며 여전히 놀라게 될 것 같다.

 

누군가를 탓하기라도 하면 답답한 마음이 시원해질까? 함께 촛불한번 들지 못한 처지때문인지, 나이때문인지 마음놓고 탓하지도 못하겠다. 외국에 살고 있는, 지금은 40대가 된 386 세대의 비애라고, 그렇게 이야기할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