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40대 아줌마의 비망록

파리아줌마 2010. 6. 7. 21:59

 

어제 아침 심하게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었다.

피곤에 쩔어 몸은 무거운데 정신은 또렷해진다.

정신없이 바쁜 토요일을 보낸뒤 비와 함께 맞이하는 일요일 아침, 눈을 뜬채 일어나지 않고 뒹굴거리고 있는데 

무엇때문인지 21년전 그날이 생각이 난다.

프랑스 비자를 받기 위해 서울역에 도착한날, 그날도 이렇게 비가 왔었던 것같다.

아님 비가 그치고 대지가 촉촉히 젖어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살고 있는 프랑스의 빗소리를 들으며 20여년전 한국의 비오는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남자의 아내로 두딸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그날이 떠오르는건 무슨 주책인가? 

고해성사를 해야된다고 생각했나? 아니, 그보다는 푸르렀던 지난 날이 그리워서일 것이다.

세상 모르고 철없이 살아왔던 바보같은 나날이었지만 지금은 살아온 한 흔적이라고 끌어안을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989년 초여름, 대구발 서울행 기차에서본 우리나라의 산천은 시리게 푸르렀었다.

차창밖으로 펼쳐진 싱그런 한국의 초여름 풍경을 하나하나 새기고 있었다.

언제 다시 보게 될지 알수 없는 떠남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난후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가요가 흘러나왔다. 마로니에의 <동숭로에서>였다.

젊음이 불타오르고 사랑하는 연인들이 만나는 거리, 동숭로를 노래한 것이다.

  

그래 ! 나는 누군가를 만나러 갔었다. 외국 나가는 이들이 의무적으로 받아야만 했던 반공교육을 받고,

프랑스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으러만 갔었다면 21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생각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어느날 엄마는 "대학 4년동안 연애 한번 하지 않았냐?" 고 하신다. 별로 할말이 없었다.

엄마의 미소띈 물음에 나도 멋쩍게 웃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엄마의 그이야기가 복선이 되었던 것 마냥 나는 누군가를 만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결정하고 난뒤 만난 사람이었다.

 

23살 처녀에게 찾아온 첫정이라 많이 좋아했었다. 

교제 사실을 안 엄마는 유학 가지마라고 나를 유혹[?]했다.

엄마는 나를 먼 외국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사람을 핑계로 잡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서울로 취직이 되어 떠나고 나 또한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와중에 돌연히 변한 그의 모습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밥을 먹을수도 잠을 잘수도 없었다. 땅밑 검은 웅덩이속으로 내가 한없이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살이 많이 빠졌었다. 입고 다니던 치마가 헐렁해졌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힘든 일을 만났던 적은 없었다.

절망을 처음으로 느껴보았다.

검은 웅덩이로 빠지면서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질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심하게 상처받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아팠지만 나는 유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그를 다시 만나면 물어보겠다고 오랫동안 다짐한게 있었다.

그때 나에게 왜그리 차가웠냐고? 무엇 때문이었냐고? 꼭 그렇게 해야만 되었냐고?

 

하지만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안 것은 물어보려고 한 시간만큼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음을 40이 넘어서야 알수 있었다.

그 순정이라는게 내 입장과 처지, 그리고 감정밖에 없었음을,,, 

그래서 지금은 그에게 무척 미안하다. 

 

나의 유학이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자신이 있었다. 참 바보같이 순진했었다.

나약한 인간의 자신감은 자만심의 변질된 양상으로 나타나 상대에게 이기적으로 비추어질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감에 대해서도 잘 살펴야되는 것이겠지.

 

수년간 그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상처를 준 사람이었다. 

나의 이기적인 순정에 다쳤을 그사람에게 지금은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1989년 대구와 서울을 다니면서 많이 아파하며 그를 만났던 날들은 추억의 장속에 곱게,

소중히 잘 간직하고 있기에 고마웠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할일이 많았던 일요일 아침, 빗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 잠시 21년전 비내리던 서울역의 분위기를 떠올려보았던 

40대 아줌마의 비망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