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식

66년전 과거사 진실규명 소송하는 프랑스인들

파리아줌마 2010. 11. 15. 09:40

오랫동안 잊혀진 마이에[Maillé] 양민학살에 대한 진실규명 소송

<누가>, <왜>?

 

1944년 8월 25일 프랑스가 독일 나치에서 해방되었을 시기,

독일군은 500명 정도 거주하고 있는 프랑스 지방의 조그마한 마을인,

마이에 [Maillé] 양민들 124명을 학살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학살은 해방에 가려 오랫동안 잊혀졌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두번째로 큰학살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책에

실리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독일군 철수당시 여러 학살들이 있었으나 마이에 학살은 잊혀졌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잊혀진 학살"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에 의해 마을이 불태워졌고, 전체가 재건축되면서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잊혀진 이유이기도 했답니다.

 

전쟁이 끝나고 <1944년 8월 25일>이라는 판만 마을에 새겨졌다가, 1984년에서야 

비로소 마을 묘지에 희생자들 이름과 나이까지 새겨진 추모비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그동안 알려진 것들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일단은 독일군들이 레지스탕스의 공격에 대한 복수라고 하는데요,

그것은 학살을 잔혹성을 설명해주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시한 사람은 독일군 하사, Gustave Schlüter라고 하는데

그는 1952년 보르도 법정에서 당사자 부재 재판으로 사형까지 구형되었다는데

범인인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965년 그의 집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소르본 대학근처에 있는, 2차 대전때 사망한 용사를 기리는 벽판입니다.

<1944년 8월 25일 이곳에서 로베르 파이에가 22세의 나이에 산화하다.> 프랑스 도처에 이런 벽판들이 있습니다.

자주 생화들이 놓여있지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그장소에 벽판이 있습니다.

 

 

생존자들 30명 진실규명을 위한 소송

 

프랑스는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독일에서는

있다고 하더라고요. 2004년 독일 도르트문트에 있는 검사가 조사에 착수했지만 확실한 것은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지난 토요일[13일] 마이에 학살의 생존자들 30명은 진실규명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들은 <누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마이에 시장은 <우리는 이학살이 누구에 의해 자행되고 왜 그랬는지 알기위해 소송하기로 결정했다>고

했습니다. 58명의 생존자와 프랑스인 증인들이 국제법 공조의뢰로 조사받게 됩니다.

그리고 현재 생존해 있는 독일군들 상대로도 조사가 진행될것이라고요. 소송은 2년정도 걸릴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10세로 다리에 부상을 입었던 Claude Daumain씨는 소송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너무 늦었다. 보다 일찍 했어야한다. 당시 모든이들은 우리를 내버려두었다.>고

그이유를 밝혔습니다.

 

당시 18세로 아버지를 잃었던  France Audenet씨는 소송은

<잊지않게 하는것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를 이야기하지 않았다>며 팔순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2008년 8월 25일 사르코지는 대통령은 마이에 추모식에 참석해서, <오랫동안 마이에 참극을 몰랐고,

생존자들의 고통에 무관심했으며, 희생자들을 기리지 않은 것에 대해 프랑스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는 나라 전체의 과오입니다. 오늘 나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치욕적인 과거사 청산으로 본을 보인 프랑스지만 이렇듯 해방에 가려 잊혀졌던 양민학살이 있었더라고요.

 

지난 66년동안 살아남은 자들은 고통속에서 살았겠지요. 

비록 오랜시간이 지났지만 <누구>에 의해, <왜> 그랬는지를 알고 싶은 것은

억울하게 죽은 망자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합니다.

그건 산자의 몫이기도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