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정점에 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대통령을 남편으로
둔 안주인들의 역할은 결코 쉽지 않을겁니다.
세인의 주목을 받으며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남편을 옆에서
지켜보며 내조를 한다는건 가족의 단란함이나, 일상의
잔잔한 행복은 뒷전으로 미루어야될것입니다.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권력이라는 화려하고도 추앙받는 위치에서
누릴수 있는것들이 더 좋은 이들도 있겠지요.
남편이 대통령이면 부인도 대통령? 남편이 장관이면 부인도 장관?
더러 이런 이상스런 관계가 성립되어 한국 사회를 탁하게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부부가 함께 살아간다손치더라도 이런식으로는 뭉쳐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존심 강한 프랑스 여인들은 남편이 엘리제궁의 주인이 되었을때 어떠했을까요?
이를 두고 몇년전 르피가로 마가진은 "그녀들의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글을 싣으며
엘리제궁의 안주인들을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만큼 그녀들은 영부인으로서 존재감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남편을 내조하기 위한 부분도 있겠지만, 영부인보다는 여성으로서, 또한 사회인으로서의 삶을
더 추구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전부인이었고, 잠시잠깐 엘리제궁의 여주인이었던 세실리아는 틀에 박힌 생활을 거부하며
독립심이 강하고, 군인형 바지에 카우보이 장화 신는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세실리아는 2005년 Télé star에서 "엘리제궁은 나를 짜증나게 하며, 내 자신이 영부인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그녀는 결국 영부인이라는 타이틀을 일찍 벗고 말았습니다.
2007년 11월 사르코지가 대통령으로 당선된지 6개월만에 이혼했습니다.
베르나데트 시락은 자신의 남편이 ENA의 학생이었을 때, 그의 서류를 치기 위해 타자를 배웠다고 합니다.
당시 그녀는 이미 남편에게 꼭 필요한 사람으로 남기로 결심했으며 이러한 결심은 2007년 5월 16일 남편이
대통령 직무를 마치는 순간까지 지켜졌습니다.
베르나데트는 시락이 정치적인 슬럼프를 겪을때도 항상 그의 옆자리를 지키며 응원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의 숨은 노력으로 시락은 2002년 재선되었습니다.
쟈크 시락도 마침내 아내의 커다란 역할을 인정하고 빠른 "토끼"(쟈크 시락)를 중단 없는 노력으로 이겨낸 "거북이" (베르나데트)라고 지칭했습니다. 남편의 두 번째 재임기간동안 베르나데트 시락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으며, '정치적으로 솔직히 말하기'와 병원치료를 받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인도주의 활동 등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며 성공적으로 영부인의 역할을 완성한 보기 드문 전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프랑소와 미테랑 대통령의 부인 다니엘 미테랑은 열정적인 사회당 당원이자 제3세계 지지자로서 끊임없는
에너지를 지닌 여성이었습니다.
미테랑 전대통령의 재임기간 중 다니엘은 엘리제궁에 들어가기를 거부해서 자택에 남았습니다.
자신의 활동을 하면서 영부인으로서 해야할 의무, 예를 들어 접견 . 외국 순방 동행 등 모든 필요한 내조를 했고, 엘리제궁은 단지 영부인으로서 일을 하는 사무실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1996년 미테랑 대통령 서거 2달 후, 다니엘 미테랑은 "사랑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물며 서로 나눌 수 있을 만큼 강한 것이다"라고 언급했는데, 여기서 "나누다"라는 말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와 나누어야했다는 의미였습니다. 미테랑 대통령이 엘리제궁의 주인이 되기 전 그는 연인에게서 배다른 딸인 마자렝 팽조를 두었으며, 다니엘 미테랑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정기적으로 숨겨진 연인과 딸을 만나기를 계속했으며, 이러한 이중 생활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부인인 안느-에이몬 지스카르 데스탱도 엘리제궁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4명의 아이들과 머물기에는 엘리제궁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엘리제궁에 자신의 방 하나와 사무실을 두고 필요한 일이 있을 때에만 머물렀다고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을 모델로 삼고 있는 남편 곁에서 7년 동안 영부인으로서의 역할은 무거운 짐이었으며,
그녀에게 엘리제궁은 시련과 연단의 장소일뿐이었답니다.
그녀의 정치적 의견과 행동은 야당으로부터 '군주정치의 아류' 혹은 '프랑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등
비판의 대상이 되어 심한 마음고생을 겪어야 했습니다. 1977년 학대받는 어린이를 위한 재단을 창설하고
이를 운영하는 보람으로 그나마 시름을 덜 수 있었는데,1981년 미테랑에게 밀려 엘리제궁을 떠나야 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남편의 등뒤에서 들리는 야유와 휘파람은 안느-에이몬 지스카르 데스탱의 지울 수 없는
마지막 악몽이었으며, 그녀에게 엘리제궁에 대한 어떠한 향수도 지닐수 없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몇년전 세상을 떠난 마담 클로드 퐁피두는 엘리제궁에 머문 시기는 최악의 해였으며,
엘리제궁은 "불행의 집"이라고 칭했습니다.
퐁피두 대통령이 앙리 4세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할 때 사랑에 빠진 클로드 퐁피두는 정치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먼 교양이 풍부한 꿈꾸는 숙녀였습니다.
그녀는 사강, 뷔페, 바자렐리, 알레킨스티 등 예술 문화적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현대미술 작품을 수집하는데 커다란 만족을 느꼈다고 합니다.
엘리제궁의 입성이 예전과 같은 문화,예술적 삶을 향유하도록 허용치 않자, 그녀는 추상 예술과 현대적 가구로
엘리제궁을 장식하기 시작했고, 1970년 신체부자유자와 노인들을 위한 재단을 설립, 이곳에 몰두함으로써
위안을 삼았습니다.
마지막 몇 달간의 엘리제궁에서의 생활은 남편의 병의 악화와 함께 그녀에게는 힘겹기만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녀는 정치는 사랑하는 남편을 지치게 하고 쇠약하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영원히 앗아갔다며,
정치를 증오한다고 했습니다.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이본느 숙모"라고 불렸던 이본느 드골은 샤를 드골 대통령의 부인입니다.
프랑스 역사가 자신의 남편에 의해 쓰여지고 있음을 충분히 인식한 이본느는 위대한 인물인 남편의 그늘에서 그림자처럼 산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떠한 인터뷰나 접견, 하물며 초상화도 허용하지 않으며, 신중하고, 남편을 보살피는데만 집중했다고 합니다.
특히 노년의 샤를 드골 대통령의 마지막 임기 동안 이본느 드골은 남편의 건강을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1968년 TV연설의 실패로 남편이 나라를 통치할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 조이며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다가 1969년 마침내 남편이 정치에 손을 떼면서 그녀는 안도의 숨을 쉴수 있었답니다.
어느 날 이본느 드골은 엘리제궁의 생활을 지칭하며 아이젠하워 미대통령 부인에게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에 살고있지요, 단지 우리만을 제외하고는..." 라는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잘난[?] 남편 둔 덕분에 별 존재감없이 마음고생하며 산 프랑스 영부인들입니다.
그녀들에게 남편의 후광은 단지 부담스런 빛일뿐이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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