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한국아줌마

외국사는게 부모님께 불효라 느껴질때

파리아줌마 2011. 3. 4. 10:09

어제[수요일] 둘째 아이를 음악학교에 데려다 주는데, 함께 수업을 듣는 쟌이 교실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무슨일로 그렇게 슬피 울고 있나 싶은게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쥐스틴에게 물어보니 <할머니가 오늘 돌아가셨다>며 속닥이 이야기해줍니다.

어찌나 안되었던지요.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해야할지 몰라, 손등과 손바닥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티슈만 건네었습니다 어린것이 그와중에 <고맙다>고 하면서 휴지를 받아들고는 눈물을 닦습니다.

수업에 들어가는 아이를 보고는 학교옆 까페로 향하고 있는데 슬피 울고 있던 어린 쟌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그날 하루, 아니 한동안 할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린 마음에 얼마나 힘들까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문득 그날 아침 친정에 전화해서 엄마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떠오릅니다할머니 안부를 묻는 저에게 엄마는 영원한 이별이 멀지 않은것 같다고 합니다. 몇년전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계신 외할머니가 얼마전 폐에 물이 차서 병원 신세를 졌고, 며칠전 엄마가 찾아갔을때는 배가 아파 가져간 간식도 못드셨다고 하면서 울엄마 울먹입니다.

항상 <빨리 돌아가셔야지> 했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할머니를 머나먼 곳으로 떠나보낼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것을 안 엄마는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아흔 할머니의 죽음을 준비하는 칠순 엄마의 슬픔을 보며, 외국에 살고 있는 저는 편찮으신 할머니 걱정보다는 다가올 이별을 슬퍼하는 엄마 때문에 더욱 가슴이 무너져내립니다. 언젠가 그날이 와서 애통해할 엄마를 부축이나 할수 있을지, 서로 함께 슬퍼하며 손이라도 잡을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어린시절 엄마의 직장생활로 인해 저희 4남매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아들이 없었던 할머니는 평생 엄마만 믿고 살아 오셨지요. 특히 막내는 어린시절에 엄마보다는 외할머니에 대한 애착이 더강했습니다. 그런 외할머니에게 몇 년전에 불청객인 치매가 왔습니다. 할머니 돌보느라 야위어진 엄마를 보다 못해 가족들은 요양원에 모시기로 결정했습니다.

몇년전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신 날, 그렇게 힘든날, 멀리 떨어져 살아 함께 하지도 못하면서 엄마에게 전화로 <할머니 요양원에 모신것에 죄책감 갖지 마라>는 소리만 했습니다. 그게 엄마나 할머니를 위해서 좋을수도 있다고 하면서요. 가족과 함께 모여 아픔을 나누어야할때에 전화 수화기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좀처럼 연락않던 오빠가 전화를 했습니다. 할머니 때문에 무척 우울해서 연락을 했을텐데 느닷없이 아이들 잘키우고 잘살아주어서 고맙다고 합니다. 술을 마셨는지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려오는 수화기 건너편에서 오빠는 표시나지 않게 울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날은 외국사는게 무척이나 싫었습니다.

2년전 한국에 갔을때 요양원으로 엄마와 아이들과 함께 할머니를 뵈러 갔습니다. 당신 손녀는 못알아보시더라고요. 하지만 증손녀들 보고는 <예쁘다>하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모처럼 4대가 테이블에 둘러앉았습니다. 

가져간 잘게 썬 토마토와 쑥 인절미를 떼어 할머니께 먹여드리고 있는데, 자꾸 목에서 뜨거운것이 치밀어 올라 꾸역꾸역 삼키느라 애를 썼습니다. 정신줄 놓은 할머니보다 첫날 당신 어머니 그곳에 모셔다 놓고 돌아가는 울엄마 발걸음이 자꾸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날, 그심정이 어떠했을까 싶은게 견디기 힘들게 밀려오더군요. 그리고 그날 엄마와 함께 할수 없었던게, 딸이라는 허울만 있었지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는게, 그죄송함에 더 힘들었던것 같습니다.

가족은 기쁠때나 슬플때나 함께 하는거지요. 때로는 서로 미워하기도 하고, 싫어질때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만나게 되고 함께 하는게 가족이겠지요. 함께 할수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좋은것이라 싶습니다. 외국에 사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그자체가 불효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한없이 기다려 주시지 않을 부모님이기에, 자주 뵐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 또한 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네요. 그렇게 프랑스에 사는게 지독스럽게 싫었던 나날들이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