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한국아줌마

외국 살면서 민족주의 외치면 무조건 친북?

파리아줌마 2011. 9. 8. 07:22

지난 7월 파리에서 40여년을 사신 한인어른과 함께 독일을 갔습니다.

독일에 광부로 오셨다가 파리로 건너와 정착하셨다고 합니다.

차로 벨기에를 거쳐 독일로 가는 긴여정 동안 여러 말씀을 들을수

있었습니다.

 

40년을 사셨으니 파리 한인 사회의 증인이라고도 할수 있겠지요.

처음 파리에 한국 식당이 문을 열었을때,[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테이블 몇개 안되는 조그마한 홀이었다고 합니다. 교민이래야 몇명 안되어

서로 알고 지냈는데, 같은 한국 사람이 파리에 식당을 개업한다고 다들

찾아가서는 좁은 식당에서 배추를 다듬어주며 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한인 관계를 서먹하게 되고 멀어지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유럽간첩단, 동백림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외국살면서 한국인 만나는게 더러 불편할때도 있지만 삶이 퍽퍽하고, 고달프다고 느껴질때는 한국인들끼리 만나

한국 음식 나누어 먹으며 편하게 이야기하면 그동안 방전되었던 정서 에너지가 충전되는것 같습니다.

 

이런 외국생활을 알기에 그 말씀을 듣고는 무척 마음이 아프더군요. 무엇이 파리의 한인들을 서로 감시하게 하고, 못 만나게 했는지, 과연 그게 누구를 위한 일이었나 싶었습니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이들의 죄목은 독일과 프랑스에 있던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했다는겁니다. 그런데 그 어른 말씀에 의하면 당시 동서로 나누어져 있던 독일이라 서베를린을 가려면 동베를린을 거쳐야 되었답니다. 동베를린을 통과할때 여권에 인장을 찍어주었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하나의 증거로 이용되었겠지요. 그리고 북한에 간 이유는 625때 헤어진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자주 북한을 드나들고, 이른바 좌파[?] 성향을 가지고 있는것으로 알려진, 파리의 어떤 한인 식당 사장님이 주장하는것은 북한과 우리는 한민족 아니냐는것입니다. 그분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슬퍼런 독재시대에

북한을 드나드는 행동은 배고파 우는 사자에게 먹잇감 던져주는격이 되지요. 제가 볼때 그분들은 무모했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공을 독재와 정권 유지에 이용하려 했던 어떤 지도자는 꿈 많았던 유학생과 교민들의 삶을

처절하게 무너뜨렸습니다.

 

파리에 유학생으로 오셨던 60대의 어떤 분 이야기를 들으니, 당시 국비 유학생은 대사관 프락치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일단 같은 유학생에게 접근해서는 친북 활동이나 성향이 없는지 은밀하게 감시했다고 하더군요. 그때에 비하자면 말도 못하게 편해진 유학생 생활이지만, 관제화하지 않았을뿐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조정래의 <아리랑>과<태백산맥>을 불역해서 출간한것도 친북이 되는 세상

 

                                                                                        변정원씨가 불역 출간한 조정래의 <아리랑>과 <태백산맥>

 

동백림 사건이 터졌던때는 워낙 오래되었고, 1960년대의 특이한[?]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런 행태는 이어져 오고 있더군요. 얼마전 조정래의<아리랑>과 <태백산맥>을 불어로 번역해서 출간한 변정원씨 부부를 만났습니다. 변정원씨는 불어권에 한국 문화와 역사를 알리는데 기여하면서 2009년 프랑스 진흥협회가 수여하는 황금언어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한국 언론에서도 조명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변정원씨는 <아리랑>과 <태백산맥> 불역 출간하고 난뒤 주위 사람들로부터 친북성향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고통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알리고 싶어 몇년동안 바캉스도 반납하고 번역했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하필이면 왜 그것이냐>고 하더랍니다. 동창회에 가서도 친북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무슨 말을 한마디해도 <그래서 그런 소설을 번역했구나>라고 했다며 진저리쳤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어찌 그정신병자 같은 김정일을 추종한다고 하냐>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씀하시더군요.

저로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라 안타까움과 분노로 가슴이 격하게 불타올랐더랬습니다.

다른것도 아니고 소설을 번역한것인데 사람들의 인식이 정말 무섭더군요.

 

저는 386세대입니다. 80년 광주 항쟁이 있었고, 87년 봄에 저는 학교 캠퍼스보다는 거리에서 보냈던 시간이 많았습니다. 가끔식 당시를 회상하며 6 25 전쟁의 후유증이 계속되던 시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망령 같은 증세는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지구 반대편에서도~

그 후유증은 언제쯤 없어질런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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