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영부인보다는 인권 운동가였던 다니엘 미테랑 세상을 떠나다

파리아줌마 2011. 11. 23. 09:08

오늘 아침 허겁지겁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컴퓨터에 다니엘 미테랑이

어제 밤[월요일]에서 오늘 아침 사이에 별세했다는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순간 멈칫해지면서 외출을 미루고 잠시 앉았습니다.

1981년에서 1995년까지 집권했던 프랑스의 좌파 대통령 프랑소와

미테랑의 부인 별세 소식에 잠시 가슴이 일렁거렸습니다.

 

아마 그분이 화려한 영부인 생활을 만끽했고, 남편의 외도로 낳은 딸을

거부했더라면 아줌마의 바쁜 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오늘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미테랑 전 대통령의 부인인

다니엘 미테랑을 처음 보았을때 영부인치고는 너무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에 적쟎이 놀랐습니다. 영부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나 봅니다.

 

제가 보기에는 미테랑의 그늘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고, 한번씩 언론에

노출되더라도 소박한 미소를 지으며 가는 목소리로 나직이 이야기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사회당의 열성 당원이었고, 제3 세계 지원자였으며, 인종차별문제, 어린이 학대,

유고슬라비아 내전등에 관심을 가진 인권활동가였습니다.

 

보통 영부인이 되어 체면상 치르는 활동이 아닌 그녀는 마치 인권 운동을 하기 위해 미테랑의 대통령 행보를 도운것 같았습니다.

 

좌파 활동을 했던 교육자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다니엘은 독일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레지스탕스에 17세에 들어가 최연소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당시 모를랑이라는 가명을 활동했던 미테랑을 만나 1944년에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는 영부인이라는 온실의 화초처럼 있기를 거부하면서 자유와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고 영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페스트 레이디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다고 합니다.

 

1981년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때 프랑스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되었을때도 일체의 인터뷰를 거부했고, 대통령 연설시 연단에 함께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엘리제 궁은 영부인으로서 일을 하는 사무실에 불과 했으며 파리의 비에브로가 자택에 머물렀습니다.

 

 

 

 

대통령의 부인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살다간 다니엘

 

1986년 프랑스 자유 재단을 설립해서는 오지를 돌며 인권 운동을 했습니다. 필리핀과 방글라데시에서 학교 설립, 인도의 문맹퇴치, 쿠르드족 고아 3백여명을 파리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멕시코의 농민해방군인 자파티스타를 지지, 물적 지원을 했고,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지도자 마르코스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미국에 대적했던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를 지지했고, 외무부 장관과 함께 탄압받는 쿠르드족 구호사업으로 지금 다니엘은 쿠르드족의 어머니로 불리기도 한답니다. 그녀는 전세계를 다니며 박해 받는 이들을 도왔고, 프랑스내에서는 영부인의 자격으로 연대를 호소하기도 했으며 자국내에서는 소외계층을 위했고, 인종 차별에 대항했으며, 불법체류자를 지원했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남편인 미테랑의 뜻과 반하는것들도 많았습니다. 불법 체류자 추방정책에 맞서는 시위에 참가했고, 달라이 라마를 만나서 미테랑을 곤란하게도 했다고 합니다. 이에 정치인들은 그녀의 행보가 프랑스 외교에 마찰을 불러일으킨다며 비난을 했다고 합니다.

 

다니엘은 내가 어떤  나라에서 압제에 신음하는 사람의 인권을 보호해 주었다는 이유로 나라의 외교를 위험에 빠뜨렸고 하자. 그렇다면 그러한 외교가 과연 걱정해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정치적 친구에게 조종될 수 있는 그러한 외교가 말이다."라고 대답했답니다. 

 

다니엘은 자연과 땅이 준 선물을 지금처럼 몇몇이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분배하는 세상, 돈이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세상, 사람이 돈의 노예가 아닌 세상, 이것이 장기적으로 내가 옳다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위엄이 돋보였던 것은 미테랑의 숨겨진 딸이 알려졌을때였습니다. 그녀는 새로운 일도 비극도 아니라면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두사람에게는 각각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결코 납득하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미테랑은 다니엘의 허락하에 숨겨놓은 딸과 애인을 죽는 날까지 책임졌습니다.1996년 미테랑의 장례식에 다니엘은 그들의 참석을 주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미테랑의 사생아인 마자랭을 부드럽게 안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큰 여인이었고, 성숙한 인간이었습니다.

 

오늘 프랑스 언론들은 다니엘의 사망 소식을 위대한 여인의 별세, 활동가의 투쟁, 사회에 참여한 퍼스트 레이디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싣었습니다. 좌파 정치인들은 위대한 휴머니즘 의식이라며 경외를 표했고, 사르코지 대통령은 그의 가치를 한번도 포기하지 않는 여인의 여정이라며 인사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영부인답게 그녀의 휴머니즘 행동을 찬미하는 댓글들이 많았습니다.

아직도 당신은 나의 영부인, 어두운 프랑스에 빛이 꺼졌어, 시끄럽지 않았지만 우리는 강한 소리를 들을수 있었던 좌파의 영부인, 우리는 당신의 용기와 투쟁을 잊지 않을것이라는 등~

 

무엇보다 제가 이끌리는 부분은 대통령의 부인이 아닌 자신의 삶을 일구어 왔다는것입니다. 그녀는 미테랑이 죽은 후에도 인권 활동을 해왔습니다. 대통령이었던 남편을 기억하는데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계속했던것입니다.

 

다니엘은 겉으로는 약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강인한 내면을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여성으로서 누구의 부인이나, 엄마가 아닌 자신이 주체가 된 삶을 산 자유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엘리제 궁에서 편안하게 있기보다는 지구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찾고, 분노하면서 도움을 주는데에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느꼈을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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