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한국아줌마

둘째 아이 가지기 위해 프랑스에 온 중국인의 사연

파리아줌마 2011. 12. 16. 08:21

작은 아이의 학교가 쉬는 수요일은 바쁩니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음악학교[꽁세르바투와르]에서 취미 활동으로

선택한 수업이 있습니다. 

 

음악 이론 수업이 시작되는 9시에 아이를 교실에 데려다 주고 나면

만나는 중국인 엄마가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를 즐겨본다고 해서 몇년전에 알게 된 아줌마였습니다.

2년 정도 보지 못하다가 올해 아이들 수업 시간이 맞아 떨어져 다시

만나게 된것입니다.

 

그녀는 고등학생 아들이 있다는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앳띤 소녀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컴퓨터앞에서 한국

드라마를 본다는 그녀는 항상 환하게 잘웃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광활한 대륙의 중국이라 그녀 부부가 자란 곳의 언어가 서로 다르다는것,

그리고 프랑스에서 운전 면허증 따기는 악몽이었다며, 체험기를 생생하게 들려주기도

했었습니다. 아이들 수업에 들여 보내놓고 동양인 아줌마들끼리 떠는 수다는 꽤나 짭짤 달콤합니다.

그것이 비록 그녀와 저에게는 어눌할수밖에 없는 불어 소통이지만서도요 ~

 

다음주부터 프랑스 학교는 2주 동안 성탄절 방학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음악학교에서도 연말 발표회를 가지곤

합니다. 어제 저녁에는 합창 발표회가 있어 그녀와 평상시보다 더많은 시간을 보낼수 있었습니다.

 

5시도 되기도 전에 어둑해지는 파리의 음산한 겨울 저녁, 아이들의 발표회를 보기 위해 그녀와 음악 학교에서

만났습니다. 여러 이야기 와중에 그녀는 느닷없이 중국에 있었다면 작은 아이는 태어나지 못했을거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잘못 알아들었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그런 상황은 있을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것 같습니다.

중국에서는 아이를 둘 이상 필히 가져야된다로 들었는데, 다시 물어 보니 그반대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아이 두명을 가지면 안된다는 소리였습니다. 그게 법으로 정해져 있답니다. 한 명 이상의 자녀를 가지면 직장에서 해고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부부는 둘째 아이를 가지기 위해 중국을 떠나 프랑스로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남 독녀로 자랄수 밖에 없었던 그녀와 친정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그녀는 1970년생이었고, 중국에서 한자녀만 가져야 되는 법이 시행된때는 1979년이었답니다. 9년동안 충분히 동생이 있을만도 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그녀가 태어나고 몇년뒤 어머니는 동생을 가졌는데 유산되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몇년뒤에 다시 아이를 가졌는데 임신 7개월에 교통사고로 또 유산이 되어버린것입니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상심은 말도 못하게 컸답니다. 이에 아버지는, 아이는 또 가지면 된다고 위로했다는데

그때가 1978년이었답니다. 그리고 그다음해에 법이 통과되어 버린것입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두고두고 이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가슴속에 한이 되어버린것이지요.

 

이것이 그녀가 무남독녀로 자랄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애초에 자녀 하나만 두기로 했다면 법이건 무엇이건 상관없습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둘째 아이를 간절히 바라던 부부에게 나라가 아예 길을 막아버린것입니다. 

 

사연을 듣고 나니 가슴이 아프다 못해 분노스럽더군요. 유산의 아픔을 겪어본지라 더이상 남의 이야기일수 없었습니다. 중국의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이념에 희생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질수 있는것조차 말살해 버리는 잔인함, 이념의 허울로 사람을 도구로 전락시켜버리는 

야비함, 하지만 짚고 넘어가고 싶은게 있습니다.

 

중국의 공산주의라는 이념만을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만행은 체제가 다른 나라에서도 있어온것들이니깐요. 인권이 무시되고, 부정이 판을 치는지도 모르게 위선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곳들도 있지요. 그들에게는 사람은 없고 명분만이 있습니다. 이념과 명분이라는 허구를 붙들고는 실체의 인간들을 공격하는것이지요.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위하자는데, 좌 우파가 어디 있겠으며, 보수와 진보가 왜 구분 되어야하며, 친북 좌빨과 수구 꼴통을 왜 들먹거려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모든게 인간의 사악하고도 헛된 욕심에서 비롯된 허울일뿐입니다. 기뻐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때로는 원망과 분노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사람답게 사는게 아주 힘든일이 되어 버린 요즘인것 같습니다.

 

프랑스에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많이 자랐기에 그녀는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는데, 남편이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중국도 많이 유연해졌다고는 하지만, 공무원들에게는 이 법이 아직도 강력하게 적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에 있었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그녀의 둘째 아이, 케 피는 지금 초등학교 5학년으로, 중국 여배우 탕 웨이 같은 분위기가 흐르는 아주 매력적인 소녀입니다. 그리고 저의 둘째와 음악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 이름만 알고, 정작 그녀의 이름은 모르고 있었네요. 다음에는 물어보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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